전두환 정권에서 '강제 퇴출' 이영섭 대법원장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져"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는 게 법관 최대의 명예훼손"

[법률방송뉴스=유재광 앵커] 대한민국 국가 의전서열 3위, 대한민국 최고재판소 수장이었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영장실질심사 '대법원장 흑역사' 얘기 더 해보겠습니다. '이슈 플러스', 장한지 기자 나와 있습니다.

'대법원장 흑역사'라고 표현을 했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장한지 기자] 네, 5·16과 12·12, 두 번의 군사 쿠데타로 대변되는 한국 현대사와 맞물리면서 대한민국 사법부도 바람 잘 날이 없었는데요.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부터 현 제16대 김명수 대법원장까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말 그대로 파란만장 ‘순탄치 않은 자리가 사법부 수장 자리다’ 이렇게 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앵커] 구체적인 예를 볼까요.

[기자] 네, 일단 불명예 퇴진한 대법원장 사례를 보면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8년 임명된 제2대 조용순 대법원장이 있습니다.

1959년, 당시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이던 경향신문이 정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이에 경향신문은 정간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받고 있는 혐의 가운데 하나인 ‘강제징용 재판거래 고의 지연’처럼요. 당시 조용순 대법원장의 대법원도 상고심 선고를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게 됩니다.

이에 한 시민이 조용순 당시 대법원장과 김세완, 배정현 대법관 등을 직무유기 등 혐의로 고발합니다.

그러나 정권의 뜻을 따라 검찰 수사도 하는 듯 마는 듯했고, 그러던 1960년 4·19혁명이 터졌습니다. 이어 4·19 이후 26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이 나오고 그 몇 시간 뒤에 대법원은 경향신문 복간을 허용하는 판결을 내립니다.

이에 하급법원 일선 판사들이 긴급회의를 열고요. 조용순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전원의 사퇴 권고를 결의하는데요. 조용순 당시 대법원장은 사표를 쓰겠다 말겠다, 계속 오락가락하다가 5월 11일 결국 등 떠밀리듯 스스로 대법원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앵커] 모양 빠지게 물러난 첫 대법원장인데, 다른 흑역사는 뭐가 또 있나요.

[기자] 네, 박정희 정권, 특히 유신 시절에는요. 대법원장의 흑역사라고 하기보다는 사법부 자체의 흑역사, 암흑기라고 볼 수 있는데요.

1968년 취임해서 1978년까지 제5대, 6대 대법원장을 연이어 지낸 민복기 대법원장 시절에는요. 판사들의 집단 항명, 이른바 제1차 사법파동이 발생하는 등 그야말로 법원이 정권의 시녀라는 비판을 받은 사법부 암흑기였습니다.

그 기간인 1975년에는 대법원 사형 선고 18시간 만에 8명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2차 인혁당 사건이 벌어집니다. 우리 사법부 사상 가장 흑역사이자 가장 치욕스러운 판결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앵커] 전두환 정권 시절은 어땠나요.

[기자] 네, 유신정권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9년에 제7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이영섭 대법원장의 행로도 절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영섭 당시 대법원장은 10·26과 12.12, 5·18 광주항쟁과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등 격동기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처리해야 했는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취임 2년 만에 사실상 대법원장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전두환이 체육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서 취임한 몇 개월 뒤인 1981년 4월 대법원장 임기를 한참 남겨두고 중도 퇴임해야 했습니다.

[앵커] 이영섭 전 대법원장이 이때 남긴 퇴임사가 인구에 많이 회자됐었죠.

[기자] 이영섭 대법원장은 퇴임식에서 "취임 초에는 포부와 이상이 컸으나 과거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회한과 오욕으로 얼룩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라는 퇴임사를 남기기도 했는데요.

이어서 퇴임사에서 사법부를 독립적인 관청을 뜻하는 '부(府)' 자를 써서 사법부(司法府)라 하지 않고, 행정부의 일개 부처처럼 보이는 '부(部)' 자를 써서 사법부(司法部)고 지칭한 건 지금도 법원 흑역사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유명한 일화로 언급되고 있습니다.

[앵커] 그렇게 이영섭 대법원장이 가고 어떤 인물이 대법원장으로 왔나요.

[기자] 네, 이어 제8대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유태흥 대법원장입니다. 1981년에서 1986년까지 대법원장을 지낸 유태흥 대법원장은요. 대법원장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국회 탄핵소추안 발의’라는 흑역사의 주인공입니다.

발단은 소신에 따라 판결한 법관에 대해서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건데요. 지금 양 전 대법원장이 받는 판사 블랙리스트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1985년 당시 불법시위 혐의로 즉결 심판에 넘겨진 대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한 인천지법 박시환 판사를 춘천지법으로 좌천시켰는데요. 이를 언론 기고를 통해 비판한 판사까지 같이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겁니다.

야당 의석수가 부족해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되진 못했지만 ‘판사 탄핵 발의 1호’라는 불명예를 안고 임기를 마쳤습니다. 여러 이유들로 유태흥 전 대법원장은 2005년 86세의 나이에 마포대교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앵커] 대법원장 흑역사, 뭐가 더 있나요.

[기자] 네, 전두환 정권 막바지인 1986년 임명된 제9대 김용철 대법원장은요. 6월 항쟁 이후인 1988년 제2차 사법파동으로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사임했고요.

노태우 정권 시절 임명된 제11대 김덕주 대법원장도 제3차 사법파동과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 공직자 재산 공개 파문에 휘말려 역시 법복을 벗은 바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저런 대법원장 흑역사가 많은데요. 대법원장을 지낸 사람이 형사사건 피의자로 전락해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는 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대법원장 흑역사의 화룡점정을 찍은 모양새입니다.

관련해서 현재 사법 불신 사태를 보면서 개인적으론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최대의 명예 손상이 될 것이다"라는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퇴임사가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앵커] 양 전 대법원장 사태를 두고 사법부의 치욕이라고들 하는데 치욕스러운 게 사법부인지 국민인지 모르겠네요. 오늘(23일)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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