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한국인 남성이 필리핀 여성과 현지에서 자녀를 낳고 잠적하는 일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가운데 시민단체에서 이들의 얼굴을 공개해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신상이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연락을 해오는 이들도 있다고 하는데요. 법적인 문제는 피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코피노 문제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선 ‘사실적시 명예훼손’. 이번주 <현장속으로>에서 자세히 다뤄봅니다. 조나리 기자가 보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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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307조 제1항의 내용입니다.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는 오랜 시간 논쟁거리였습니다.
다만 2021년 2월, 헌법재판소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 5대 4로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헌재는 헌법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타인의 명예와 권리를 한계로 명시하고 있고, 명예훼손이 사적 제재 수단으로 악용될 위험성이 있다며 처벌 조항이 정당하다고 봤습니다.
이 조항은 현재도 헌법재판소의 재판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무조건 처벌받는 것은 아닙니다. 형법은 사실 적시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사유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법 제310조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는 처벌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적시된 사실이 진실할 것과,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라는 두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여기서 진실은 결과적으로 사실과 달랐을지라도 행위자가 ‘진실한 것으로 믿은 경우’도 해당합니다.
다만, 진실한 것으로 믿은 때 역시 법원이 제반 사정을 고려해 판단합니다. 대표적으로 언론 보도를 보고 그 내용을 적시한 경우, 진실한 것으로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법원은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입니다. 어디까지를 공공의 이익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은 행위자와 검찰, 법원, 사회적 평가가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시민단체 ‘양육비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코피노 아빠들의 신상을 공개하고 있기 때문인데요.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한국인 아버지들이 연락을 해오기 시작한 겁니다. 7년간 잠적했던 아버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소식이 닿았습니다.
이 단체를 운영하는 구본창 대표는 과거에도 ‘코피노 아빠’를 공개하거나 배드파더스 사이트 운영자에게 양육비 채무자의 정보를 제공해 대중에 공개해 왔습니다.
이후 구 대표는 정보통신망법 위반에 의한 사실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여러 건 고소장이 접수돼 재판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1월, 구 대표는 벌금 100만원의 선고를 유예한 원심판결을 확정받았습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1심에서 구 대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위를 인정받아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항소심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구 대표의 신상 공개 행위가 ‘사적 제재’로서 현행법에 어긋난다는 취지입니다.
항소심은 “양육비 지급과 관련한 문제는 공적 관심 사안”이라면서도 “양육비 미지급자의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사적 제재가 허용된다면 개인의 사생활이나 인격권을 침해할 수 있다”며 “이 사건 정보에는 얼굴과 직장명까지 포함돼 있는데, 과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이런 정보가 필요한지 의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다만 2심 재판부는 범행 경위에 참작할 점이 있다며, 벌금 100만원의 선고를 유예했습니다.
결국 구 대표의 활동 역시 공공의 이익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달라지면서 무죄에서 유죄로 뒤집힌 사례입니다.
그나마 구 대표의 경우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실제 재판에서 공익 목적은 인정받기 쉽지 않습니다.
법원 통계에 따르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유죄 비율이 80%대에 달합니다. 이는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재판의 유죄 비율과 큰 차이가 없는 수치입니다.
현재 배드파더스 사이트는 폐쇄됐습니다. 대신 성평등가족부가 양육비 채무자의 이름과 생년월일, 직업, 근무지, 채무 불이행 기간, 채무금액 등 총 6개 항목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얼굴 사진은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구 대표는 배드파더스 운영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있은 후 ‘코피노 아빠’ 공개에 앞서 고민이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나 배드파더스의 취지를 인정해 정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만큼, ‘코피노 아빠’ 문제 또한 사회 의제로 끌어내겠다는 방침입니다.
[구본창 / 양육비해결하는사람들 대표]
“아빠 찾기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볼 때 비방의 목적이 아니라 공익적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러나 사실적시 명예훼손에서 공익이라고 하는 판단은 판사의 주관에 따라 너무 달라지기 때문에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변호사들이) 말합니다.
그러면 제 입장에서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럼 이걸(코피노 아빠 공개) 하지 말아야 하느냐? 그래도 해야 하느냐? 이런 갈림길에 섰던 거죠. 저는 은퇴한 사람이고 제가 처벌을 받아봐야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니까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을 받더라도 그냥 하기로 한 겁니다.”
구 대표는 단체 활동을 지원하는 변호사들과 함께 사실적시 명예훼손의 법망을 피하기 위한 나름의 묘수를 고안하고 있습니다.
최근 구 대표는 자신의 SNS에 ‘아이와 연락이 끊긴 구본창 님을 찾습니다’라는 문구와 자신의 사진을 올렸습니다.
이는 단체 활동의 공익적 성격을 우회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구본창 / 양육비해결하는사람들 대표]
“‘양육비 해결하는 사람들’의 변호사들이 모델을 만든 겁니다. 그러니까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최대한 피하면서 코피노 아빠들, 또 코피노 아빠들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양육비를 안 주려고 양육자한테서 연락을 차단하고 위장전입으로 숨은 사람들이 많거든요. 그 사람들을 공개하는데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최대한 피하면서 공개할 수 있는 그 내용을 만든 거죠.”
하지만 이 같은 조치에도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현재 코피노 아빠는 물론 국내에 자녀를 둔 양육비 채무자들의 신상을 지속 공개하고 있는 구 대표는 향후 법적 시비에 휘말릴 경우 처벌을 면치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현 단계에선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나 법 개정을 통한 제도 변화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구본창 / 양육비해결하는사람들 대표]
“재판관의 주관에 따라 너무 달라지기 때문에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는 거죠. 변호사들도 이건 예측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5월 정도에 국민청원을 해서 동의자가 6만명이 넘었거든요. 그런데 이 심사를 내년 5월로 미뤘습니다. 국회에서. 내년 5월로 미뤘다는 얘기는 별로 할 의지가 없다고 보이는 거죠.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기득권층이거든요. 그러니까 기득권층 입장에서는 좋지 않죠. 당연히 어느 사회에서나 기득권층의 입김이 센 거니까 이건 무시되는 거죠. 그냥...”
사실적시 명예훼손 조항을 손보기 위한 움직임이 국회에서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9월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는 형법 제307조 1항을 삭제하고, 정보통신망법에서도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제외하는 개정안을 대표발의 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또한 지난 11일 국무회의에서 형법 제307조 1항의 폐지 여부를 검토할 것을 법무부에 지시했습니다.
법무부가 혐오표현 처벌과 관련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겠다고 보고하자 “사실적시 명예훼손 제도의 폐지도 동시에 검토하라”고 지시한 겁니다.
[이재명 대통령 / 2025.11.11. 국무회의]
“혐오 표현 관련해 형법 개정을 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만약에 하게 되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도 이번 기회에 폐지하시는 걸 검토하십시오. 있는 사실을 얘기한 것으로 명예훼손이라고... 그건 민사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형사처벌 할 일은 아니고...”
구 대표는 사적 제재의 우려와 관련, 피해 당사자의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처벌을 내려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말자막↓
[구본창 / 양육비해결하는사람들 대표]
“사실적시 명예훼손이 예를 들어 성추행을 당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건 꼭 필요하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반대로 성추행 당한 사실을 본인은 알리기를 원치 않는데 다른 사람들이 알리면 2차 가해가 되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거든요. 피해자 본인이 알리거나 혹은 피해자 본인에게 동의를 받은 사람이 올리는 것은 처벌하지 않는다고 하면 아주 간단하게 부작용이 해소되는데 이걸 제가 볼 때 법률가들이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실제로 이와 비슷한 사례가 얼마 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바로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 가해자들의 신상 공개입니다.
지난해 일부 유튜버들이 밀양 여중생 사건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했다면서 그들의 신상을 마구잡이로 공개해 논란이 됐습니다.
사적 제재 우려도 제기됐지만, 사건에 공분하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받으면서 폭로 채널도 덩달아 늘었습니다.
한 채널 운영자는 사건 판결문까지 공개해 2차 가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피해자 측의 동의 없이 가해들의 신상이 폭로되면서 더욱 문제가 됐습니다.
피해자의 동의 없이 이뤄진 가해자들의 신상공개는 사건과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이들에까지 피해를 미쳤습니다.
밀양 사건 유튜버들의 재판을 진행 중인 법원에서도 “이 사건 피해자들은 사실적시 명예훼손 피해자와,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피해자로 나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사실적시 혐의와 관련해서도 최근 유죄판결이 잇달아 선고되는 상황입니다. 오로지 타인을 비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상을 게시했다는 이유입니다.
법원의 법리와는 별개로 유엔 인권기구는 한국 정부에 사실적시에 대한 처벌 조항 폐지를 수차례 권고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한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철옹성 같은 사법부의 공익성 판단 기준을 뒤로 하고, 사실적시 명예훼손은 이제 존재 이유를 묻는 심판대에 올라섰습니다.
허위 정보의 무분별한 유포가 또 다른 사회 문제가 되고 있지만, 사실을 말한 이유로 처벌을 받는 구조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법률방송 조나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