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외교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이 존재하는 게임이며, 그 결과는 최종적으로 상대방과의 합의로 정리된다. 그러나 각국의 외교부는 외교 현안에 대한 협상 과정에서 최대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다층적 메시징(multi-layered messaging) 전략'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최종 합의에 앞서 존재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전략적 유연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통상적으로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서 하위 직급의 실무자나 국책 연구소의 연구원이 ‘매파’의 역할을 자처하며 강경한 어조의 논평을 내는 것은, 상대방의 공격 범위(reach), 반응(reaction), 혹은 의사(intent)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협상에서 자국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의 폭을 최대한 넓힌다. 이후 외교장관 등 고위급 인사가 ‘비둘기파’의 역할을 맡아 다소 완화되거나 엇갈린 목소리를 내어 상대방에게 출구 전략을 제공하는 유연성을 보인다. 이들은 실무자의 강경론을 협상의 빌미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최고 지도자가 최종적으로 메시지를 정리해 최적의 외교적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전략을 교묘하게 구사하는 국가로 북한을 꼽을 수 있다. 외무성 부상이나 부부장이 험악하고 강도 높은 비난 성명을 발표해 긴장을 끌어올린 후, 외무상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대화의 여지를 남기는 방식으로 협상을 이어간다. 주목할 점은 북한에서 외무상과 다른 목소리를 낸 부상이나 부부장이 숙청되기는커녕, 계속 그 직을 유지하면서 또다시 강경한 어조의 성명이나 논평을 발표한다는 사실이다. 전체주의 국가인 북한조차 일관된 목소리가 아닌 다층적 메시징을 통해 선택 가능한 옵션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국의 경우, 대통령실은 최종 결정권이 대통령에게 있음을 강조하며 이에 어긋나는 목소리를 모두 불필요한 혼선으로 치부한다. 외교 현안이 발생했을 때 대통령실이 지나치게 이른 시점에 성급히 성명을 발표하고, 다른 메시지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외교관들은 용산의 기조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순간 문책을 받을 위험에 노출되기에, 외교 협상에서 다층적 메시징 전략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외교부는 외교 현안에 대한 옵션의 폭을 확인하기 위한 사전 작업조차 꺼리게 되고, 다층적 메시지를 개발하는 역량도 상실하게 된다. 반면 상대국은 한국의 외교 방향을 손쉽게 예측할 수 있기에 매번 협상에서 우위를 점한다. 대통령실이 일단 기조를 정하면 외교부는 이를 반복적으로 되풀이할 뿐, 상대국의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 기만적이거나 전략적인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외교적 갈등 상황에서 강경한 카드(A)와 유화적 카드(B)를 동시에 준비하고, 상대의 반응에 따라 적절한 카드를 꺼내는 전략이 필수적이지만, 대통령실의 기조가 강요되면 처음부터 한 가지 카드(A)만 남게 된다. 결국 상대방이 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면 모든 카드를 미리 공개한 한국 외교는 외통수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일례로 사드(THAAD) 배치 당시,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외교적 대화를 유지하면서도 국방부·지방정부·언론 및 관영 연구소를 통해 ‘한한령’이라는 비공식 경제 보복을 가하는 방식으로 한국을 압박했다. 반면 한국은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철회냐 수용이냐’는 이분법적 메시지로 일관하며, 중국의 다층적 압박에 대응할 비공식 채널이나 전술적 대안을 능동적으로 발굴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은 경제적 피해를 입으면서도 유연한 출구 전략을 찾지 못하고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외교부 내에서 건전한 정책 경쟁이 아닌 정파적 대립 구도가 강요된다는 점이다. ‘자주파’나 ‘동맹파’ 같은 이분법적 프레임을 씌워 다른 목소리의 인사를 숙청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는 것은 외교 역량을 더욱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외교부 내에서 상대국을 상대로 능수능란하게 줄타기를 하며, 상황에 따라 전략을 바꿀 수 있는 유연한 외교관들은 정파적 논리에 쉽게 위축되거나 배제된다. 이들은 숙청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침묵을 선택하기 쉽다. 결국 한국 외교가 대통령실의 ‘원보이스(one voice)’에 끌려다니는 동안 협상에서의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무기를 스스로 포기하고 협상력 약화를 초래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외교 자산의 손실이라는 결과를 낳고 있다.

대미 외교에서도 단일 목소리의 경직성은 늘 문제로 작용한다.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기조를 택할 경우, 외교부는 미국의 요구에 대해 협력 외에는 다른 대안을 전술적으로 검토하지 않는다. 이러한 일관된 기조는 한국의 전략적 역할과 발언권을 확장할 기회를 스스로 잃게 만든다. 이는 ‘전시작전권 전환’ 등 한미동맹의 재조정을 강조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반면 미국의 경우 국무부, 국방부, 국가안보회의(NSC)가 동일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메시지를 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관세 및 무역정책과 관련해 트럼프 대통령과 재무장관, 상무장관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이후 국무부의 협상력을 강화한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 외교가 상대방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경직된 외교에서 벗어나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북한·중국·일본 등과의 복잡한 외교관계 속에서 최선의 국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유연한 외교 전략과 다층적 메시징이 필수적이다.

대통령은 다층적 메시지가 한국의 전략적·외교적 옵션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임을 인식하고, 외교부 내의 다양한 목소리를 전략적 자산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외교관들이 창의적으로 다층적 메시징을 실행할 수 있도록 ‘숙청’이 아닌 ‘관용’을 보여야 한다.

한국 외교는 ‘단일 목소리’라는 덫에서 벗어나야 한다. 때로는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으로 보일지라도, 전략적으로 깊이 있는 다층 메시지를 구사할 때 비로소 국제무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외교가 커진 위상에 걸맞은 실력을 갖추는 유일한 길이다.

/모성준<판사ㆍ사법연수원 교수>

이재명 대통령이 3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제1세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31일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제1세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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