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나는 이 종이가 우리 시대의 평화를 보장한다고 믿습니다(I believe it is peace for our time).”
영국의 수상 네빌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30일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뮌헨 협정을 체결한 후 런던 헤스턴 비행장으로 돌아와 군중을 향해 손에 든 종이를 흔들었다. 그 종이는 (a) 체약국이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지대인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독일에 양도하는 것을 승인하는 대신, (b) 히틀러가 더 이상 다른 국가의 영토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는 내용의 뮌헨 협정서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약속을 믿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내주는 것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협정서가 ‘우리 시대의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 확신했기에 다우닝가 10번지 총리 관저로 돌아와서도 자신의 외교적 성공을 자찬하는 데 바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기억하고 있던 체임벌린은 두 번 다시 전쟁을 겪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1938년 3월 히틀러가 생제르맹 조약에서 금지한 오스트리아 병합을 강행했을 때도 그는 외교적 항의 이외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많은 영국인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키는 것과 같은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평화를 지키고 싶어했기에 윈스턴 처칠이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고 비판한 것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평화를 향한 체임벌린의 간절한 마음만으로는 히틀러의 팽창 야욕을 저지할 수 없었다. 히틀러는 뮌헨 협정에서 주데텐란트 합병이 ‘마지막 영토요구’라고 공언하였지만 그는 약속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독일은 뮌헨 협정 6개월 뒤인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점령하였으며, 같은 해 9월 폴란드를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히틀러의 거짓된 서명이 담긴 협정서를 자랑스럽게 흔들며 ‘우리 시대의 평화’를 외쳤던 체임벌린의 순진한 믿음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발표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 발발 8개월 후인 1940년 5월 총리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오늘날의 세계는 1930년대의 상황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모두가 전쟁을 피하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지만, 영구적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믿었던 국제 질서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전쟁을 넘어 시리아·이란·예멘과 교전을 계속하며 중동에서 전선을 확대하고 있다. 급기야 이스라엘은 카타르에까지 로켓을 날려 하마스 지휘부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미국 또한 이란의 핵시설을 폭격하였고 베네수엘라에 대한 전투 준비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여기에 파키스탄과 인도 사이의 공중전이나 태국과 캄보디아 사이의 교전이 새롭게 발발하는 것도 전 세계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우려할 만한 것은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가 최근 나토(NATO) 회원국인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영공에 드론을 날려 공격의 틈을 엿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국지적 갈등이 언제든 확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위험한 징후이다.
여기에 북한의 김정은이 2025년 8월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시진핑·푸틴과 함께 중국군의 사열을 받음으로써 동북아에서 달라진 북한의 위상을 과시했다. 북한 인민군의 러시아 파병 이후 북한과 러시아·중국과의 군사 협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최근 북한이 극초음속 미사일의 실전 배치를 서두르며 호위함을 차례로 진수시키는 등 군사력을 확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로부터 핵잠수함 원자로·방공장비·군사위성·전자전 장비를 도입하고 있는 상황은 심히 우려할 만하다. 동북아에서의 군사 분쟁이 우리가 예기치 못하는 형태로 전개될 위험이 어느 때보다 커진 것이다.
이제 우리 또한 군사 분쟁의 확산을 먼 나라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중국 공산당은 여러 차례 무력을 사용한 대만 침공을 고려하고 있음을 밝혔을 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만 침공 가능성을 부인한 바 없다. 오히려 2027년까지 대만 침공이 가능한 수준의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해군과 공군, 해병대의 전력을 빠른 속도로 확충하고 있다. 또한 중국 인민해방군은 대마도 인근 해협에 한국과 일본의 감시 역량을 파악하기 위해 스텔스 전투기를 수시로 보내고 있고, 서해 잠정조치수역(PMZ) 내 우리 관할 수역에 스텔스 호위함(6,000톤급)을 하루에 3차례씩 들여보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무력 과시가 아니라 모두 잠재적 충돌 시나리오를 대비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중국의 대만 침공 시 전쟁의 범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큰 착각에 빠져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이 현실화될 경우 한반도에 전쟁의 불똥이 튈 것인지 여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체임벌린의 순진한 믿음과는 무관하게 히틀러가 침략 전쟁의 범위를 결정했던 것처럼, 대만 침공으로 펼쳐질 전쟁의 범위는 중국이 결정하게 될 것이다. 한반도 유사 시 북한이 가만히 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만약 중국이 북한과 협력하여 주한미군과 한국군을 저지하기로 한다면 우리 또한 어쩔 수 없이 군사적 충돌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의 외교 역량이나 군사 준비 태세는 참담하기 짝이 없다. 주요국 공관장들이 여전히 공석인 채로 방치되어 있고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공장을 관할하는 주(州) 애틀랜타의 총영사직 또한 공석이다. 해외 정보요원 명단이 유출된 이후 증발해버린 대외 첩보 역량은 아직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새로운 형태의 전쟁에 대응하겠다며 야심차게 출발한 드론작전사령부는 특검의 조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외교·첩보 및 국방의 최일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맥상은 누군가의 ‘마지막 영토요구’를 마주했을 때 순진한 믿음에 기대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막이 오르고 있는 전쟁의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체임벌린의 순진한 평화론이 결국 파멸적 전쟁으로 이어졌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현재 동북아시아 정세 또한 순진한 믿음에 기댈 수 있을 정도로 한가하지 않으며, 앞으로 군사적 충돌이 없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바람에 의지하여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앞으로 긴박하게 전개될 상황 속에서 실질적으로 전쟁을 억지하기 위해서는 외교 및 첩보 역량의 확충과 군사력 강화가 무엇보다 시급하다. 독재자의 말 한마디나 그의 서명에 대한 순진한 믿음으로는 ‘우리 시대의 평화’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전체주의 정권에 대한 굴복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처칠의 냉철한 현실 인식에 기초하여 실질적 대응 수단들을 마련할 때다.
/모성준<판사ㆍ사법연수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