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대한민국과 중국은 오랫동안 '배타적 경제수역(Exclusive Economic Zone, EEZ)'의 경계선에 대한 협상을 계속했지만 이에 대한 최종적 합의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2001년 발효된 한중 어업협정에서도 양국이 주장하는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통상 해안선에서 200해리)가 겹치는 해역을 '잠정조치수역(Provisional Measures Zone, PMZ)'으로 설정하고, 향후 배타적 경제수역으로 지정하기 전까지 이를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합의하였을 뿐이었다.
문제는 중국이 2018년부터 잠정조치수역 내에 대형 철제 구조물 선란 1호를 설치한 이후 거듭하여 해상구조물을 설치하면서 발생하였다. 한중 어업협정은 잠정조치수역에서의 어업활동에 대한 관리 조치에 대한 규정을 두고 있었지만(제7조 제3항), 구조물 설치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의 구조물 설치(현재까지 3기, 일부는 헬기 착륙장 포함)는 배타적 경제수역에서의 현상 변경을 초래하는 행위로서 유엔해양법협약에 위배되는 것이고(UNCLOS 제74, 83조), 한중 어업협정의 취지와 관행에 비추어 보더라도 허용되지 않는 행위로 볼 여지가 크다.만약 대한민국이 잠정조치수역에 해상구조물을 설치하였다면 중국이 두 팔을 벌려 이를 환영할 리 없다.
또한 갈수록 따뜻해지는 서해의 한가운데 잠수함이 다니는 길목에서 한류성 어종인 연어 양식을 한다는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데다가, 중국이 설치하고 있는 구조물이 계속 커지고 있는 것을 보더라도 미심쩍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시설물이 설치된 위치를 감안하면, 해당 구조물은 잠수함의 이동정보를 수집하거나 잠수함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군사용 시설물이라고 볼 여지가 크다.
사실 중국이 회색 지대 압박을 통하여 다른 나라의 영해를 야금야금 침범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중국은 남중국해의 90%가 자국의 영해에 속한다며 일방적으로 '구단선(九段線)'을 그어놓고, 필리핀의 스카버러 암초 등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왔다. 중국은 과학 연구 등을 명분으로 들면서 상설 구조물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공섬을 건설한 다음 군사기지를 세우는 방식으로 사실상의 지배력을 확대하였다. 그 과정에서 중국 해경은 필리핀 해경이나 선박을 상대로 물 대포 공격, 위협 비행, 선박 충돌, 항로 방해 등을 반복적으로 감행해왔다.
그간 필리핀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필리핀은 2016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중국의 영유권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 없다는 중재판정을 이끌어낸 이후, 국제사회 내에서 중국의 반복적인 도발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아울러 필리핀 해군 함정과 해경선을 분쟁 해역에 배치하고, 미국, 일본 등과 합동 해상 훈련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두테르테 정부(2016~2022)가 미군과의 방위협정 종료를 통보했다가 철회하는 등 외교노선의 혼란을 계속함에 따라 전략적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고 필리핀의 대응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필리핀의 말뿐인 대응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중국은 필리핀이 무엇을 하더라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중국이 최근 서해 잠정조치수역 내에 대형 구조물을 설치한 것은 과거 남중국해에 인공섬을 설치함으로써 실효적 관할권을 확대해 나가던 회색지대 전략의 시작 단계와 별 차이가 없다. 대한민국의 해양과학조사선 온누리호가 올해 2월26일 중국의 해양구조물을 조사하려다 중국 해경 함정 2척(3,400톤 급)과 고무보트 3척으로부터 위협을 받다가 대치 끝에 철수한 것만 보더라도 남중국해에서의 회색지대 전략이 이제 서해로 온전히 옮겨 왔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제1도련선 안쪽의 서해를 전략적 핵심 해역으로 보고 현재 내해화를 진행하면서 해상구조물 설치와 군함 전개를 통하여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는 것도 남중국해에서 구단선을 주장하며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이처럼 중국이 서해 전역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편입하려는 전략적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상, 중국의 실효적 지배확대에 대하여 한중 어업공동위원회를 통해 문제를 제기한다거나, 외교부가 우려를 전달하는 것에 별다른 의미가 있기 어렵다.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에 대해서는 ‘상호주의’ 이외에 다른 대응방안을 상정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미 중국은 서해를 내해화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힌 바 있고, 잠정조치수역에 총 12기의 해양구조물을 설치하겠다는 계획 또한 갖고 있다. 아울러 중국이 설치한 구조물은 헬기 이착륙이 가능한 정도로 대형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 정부 당국자들은 ‘앞으로 우려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경향신문 2025년 4월24일), 전재수 해양수산부장관 후보자 또한 지난 14일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하겠다"라며 한가한 인식만을 드러냈다. 다시 말하지만, 어제의 필리핀에서 우려하던 일은 오늘날 현실화되었고, 원만하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필리핀의 교훈을 애써 무시하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서해에서도 ‘노 세일 존’을 설정하여 선박 운행을 방해하고, 대한민국의 영유권 회복 시도를 무력으로 분쇄하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게 될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응은 국제법적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필리핀이 2013년 PCA에 중국을 제소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PCA에 중국을 제소하여 조속히 잠정조치를 얻어내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만약 중국이 참여하지 않는 경우라면 중재판정을 받더라도 실효적인 강제집행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서해에서 EEZ에 대한 권리 또는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가 없음을 확인하고, 한국의 EEZ에 대한 권리를 확인하는 중재판정을 받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마지막으로, 자원개발·어업·관광 등 경제적 피해 우려로 소극적이었던 기존의 입장은 전면 재검토하고, 적극적으로 상호주의적 조치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만약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당초 예정된 12개의 구조물을 모두 설치할 것이고, 필리핀의 사례(부표→모듈식 플랫폼→매립 인공섬)와 유사하게 해당 구조물들을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현실화되기 전에 대한민국 또한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양식이나 과학연구 목적의 구조물을 설치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특히 중국이 잠수함의 이동경로에 시설물을 설치하고 있다는 점에 대응하여, 대한민국 또한 잠정조치수역 내에서 중국 잠수함의 항행경로에 위치한 곳을 선점하고 이곳에 어업용 구조물(과학 관측 부이 및 양식 시설)을 세울 필요가 있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어제의 필리핀과 같은 대응을 하는 경우 내일의 대한민국은 오늘의 필리핀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에 말로만 대응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오늘날의 필리핀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의 사례가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검증된 회색지대전략을 서해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이상, 대한민국은 국제법적 접근과 동시에 상호주의를 바탕으로 대응을 시작하여야 한다.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이 더 이상 우려하는 일을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를 버리지 않고, 중국의 선의를 믿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서해 전부를 중국에 내어주는 어리석은 결과에 이르게 될 것임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성준 판사<사법연수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