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치주의 갈 길 멀다 - 시류와 집단이익 따라 달라지는 법 집행
법치주의 갈 길 멀다 - 시류와 집단이익 따라 달라지는 법 집행
  • 박한규 전 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 승인 2020.06.0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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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규 전 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박한규 전 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문희상 국회의장은 5월 21일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면 문제에 대해 "사면을 겁내지 않아도 될 시간이 됐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라 전제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아직 그 어느 혐의에 대해서도 확정된 형이 없으며 본인은 계속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사면은 문자 그대로 ‘죄’를 ‘용서(赦)’하고 형을 면제해주는 일인데 법원이 확정하지도 않고 본인도 인정하지 않는 사건을 어느 누가 범죄로 단정하고 하물며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이재용 부회장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는 2019년 10월 첫 공판에서 이 부회장과 삼성에게 과감한 혁신, 내부 준법감시제도 마련, 재벌체제 폐해 시정 등 3가지를 주문했다. 판사가 반성이나 혐의에 대한 시인 여부 등 재판에 임하는 태도를 선고 형량에 참작할 수는 있지만, 혐의에 대한 사실 확인이 아니라 이렇게 요구사항을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써 오라고 하는 일은, 결국 요구를 받아들이면 형량에 참작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전혀 무리가 아니다.

검찰은 4월 9일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을 포함한 조직적 성 착취 영상물 제작 사범에 엄정 대응하기 위해 가담 정도를 불문하고 전원 구속해 수사하는 '성 착취 영상물 사범 사건처리기준'을 발표했다. 성 착취 영상물 제작 사범 혐의자에 대해서는 도주나 증거인멸 가능성 유무를 따지지 않고 영장을 청구하겠다는 뜻이다.

38명이 사망한 4월 29일 경기도 이천시 냉동창고 건설 현장 화재 사고에 대해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은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도 사고 책임의 범위를 넓혀서 살펴보고 있다"고 했다. 뒤집어보면 지금까지는 ‘국민의 기대’가 없으면 보통 ‘좁혀서’ 살펴보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법치주의, 특히 형사처벌에는 죄형법정주의가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인은 수사, 기소, 재판의 결과를 송두리째 무위로 돌릴 수 있음은 물론 최소한의 요건도 갖추지 않은 사안에 대해 아무런 주저 없이 사면을 거론한다. 법원은 피의자에게 요구사항을 제시하면서 형량을 저울질한다. 수사권을 가진 경찰은 수사의 폭과 깊이를 자의적으로 결정하겠다 했고, 기소권을 가진 검찰 역시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취지를 무시하면서 구속영장 청구권을 마치 처벌권처럼 행사하겠다고 밝혔다.

누가 언제 저들에게 저런 권한을 부여했으며, 저런 관행이 얼마나 공고하길래 상급기관의 제재도 언론의 비판도 없다는 말인가? 하물며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권한을 남용하면서도 일말의 조심은 고사하고 마치 대단한 일을 하는 양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법을 만들고 수호해야 하는 중추 기관들의 태도가 이러니 많은 국민들은 법의 집행과 판단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이 나라가 과연 법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인가 하고 의구심을 안고 산다. 한국법제연구원이 2019년 실시한 ‘국민 법의식 조사’에 의하면 우리 국민의 법치주의 인식지수는 100점 만점에 50.99로 간신히 절반을 넘는 수준이다. 참 부끄러운 수치다.

법은 완벽하지 않다. 고정불변의 진리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도 나도 시류에 편승하거나 집단의 이익 등에 따라 법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주장한다면 법치주의는 멀어진다. 정치권, 법원, 검찰, 경찰이 자의적으로 법을 판단하고 그들만의 기준으로 법을 운용한다면 이 나라는 법치국가가 아니라 정당공화국, 법원공화국이거나 검찰공화국, 경찰공화국에 불과하다. 엄정한 법 집행을 요구한다.

박한규 전 대한법률구조공단 홍보실장 webmaster@law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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