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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방송뉴스]

유신체제를 비판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금되거나 처벌받은 피해자에게 국가가 배상금을 물어줘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대법원은 대통령의 발령 행위는 물론 수사기관의 수사와 기소, 법관의 재판행위가 일련의 과정으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봤습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어제(30일) 박정희 정부 시절 긴급조치 9호 피해자와 그 가족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상고심에서 원고패소한 원심 중 일부를 파기하고, 서울고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대통령 긴급조치 9호는 1972년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발동한 조치 중 하나입니다.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해 1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피해자들은 1970년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기소돼 복역하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지난 2013년 헌법재판소는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위헌 결정했고, 같은 해 대법원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다"며 해당 법령을 위헌·무효로 판단했습니다. 

피해자들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고, 법원의 형사보상결정에 따라 형사보상금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이후 긴급조치 9호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며 2013년 9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대법원은 2015년 "유신헌법에 근거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며 "대통령은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 발령행위 자체뿐 아니라 긴급조치 9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이 민사상 불법행위라고 주장했습니다.

1심은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여도 국가에 민사상 배상책임을 물 수 없다는 종전 대법원 판례를 들어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재판부는 "유신헌법 53조 4항이 '1항과 2항의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며 "긴급조치 9호가 위헌·무효임이 선언되지 않았던 이상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습니다. 

피해자들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 역시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긴급조치 9호 발령은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 행위 였다며, 불법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다수의견으로 종전 판례를 7년 만에 변경하고,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습니다. 

대법원은 대통령·수사기관·법관개인의 불법행위 책임을 일일이 따질 필요없이 긴급조치 9호 발령과 이에 따른 수사와 재판 일련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보고 위법성이 인정되면 국가 배상책임이 있다고 전했습니다. 

아울러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체포·구금돼 수사를 받았거나 기소돼 유죄판결을 선고받아 형을 복역해 입은 손해에 대해 국가가 국가배상법 2조1항에 따른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당시의 대통령과 수사관, 법관 등에게 개별적인 책임을 물을 순 없지만, 적어도 국가 차원에서는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임이 명백하고, 긴급조치 9호 발령으로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그에 따른 강제수사와 공소제기, 유죄판결 선고를 통해 현실화됐다는 게 사법부 판단입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직무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 위법하다고 평가된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번 판결로, 현재 진행 중인 30여건의 비슷한 재판에서도, 피해자들은 배상받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긴급조치 9호뿐 아니라 1호와 4호 관련해서도 여러 소송이 진행 중입니다.

다만 이미 패소 판결이 확정된 피해자들은, 현행법으로는 구제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일부 시민단체는 정부 차원의 공식 사과와 피해자 구제를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도 2015년 대법원 재판부의 사과와 소명을 요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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