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이다.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진흙을 빚어 만들게 했다. 왜?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였다.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가져다 준 티탄족 아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의 편이었다. 프로메테우스가 괘씸했던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선물을 한다. 상자였다. 제우스로부터 어떤 선물도 받지 말라는 프로메테우스의 금기를 위반해 판도라는 상자를 열고 마는데...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상자에선 인간을 괴롭히는 모든 질병과 불행, 고통이 퍼져나갔고 단 하나만 남았다. '희망'이었다.

그 장면을 상상해 뛰어나게 그린 작품은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가 그린 '판도라'(1896)였다.

 '판도라', 개인소장
 '판도라', 개인소장

상자에 남은 희망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중적이다. 절망 속에서도 인간을 일으키는 '축복‘이라는 긍정이 있는가 하면, 실현되지 않을 허무함에 매달리는 ’재앙‘이라는 인식이 교차한다.

비록 결과는 신기루 같은 함정이었을지라도, 희망은 인류 역사에서 떼놓을 수 없는 안간힘이었다. 희망마저 가질 수 없다면, 절망은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줄 것인가. 희망이 있기에 지탱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은 언뜻 보면 희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빛은 어둡고, 맨발의 여자는 눈을 붕대로 가렸으며, 자세는 흐트러져 있다. 편안해 보이지 않는 구(球) 위에 앉아 있어 위태롭기까지 하다. 끌어안고 있는 현악기를 자세히 보면 줄은 하나만 남고 다 끊어져 있다. ‘아, 절망이야!’라고 생각하며 제목을 보니 반전이다.

 ‘희망’, 와츠 갤러리 소장
 ‘희망’, 와츠 갤러리 소장

영국의 조지 프레데릭 와츠(1817~1904)가 그린 ‘희망’(1886)이다. 와츠는 이 주제를 얼마나 사랑했던지 네 가지 버전으로 그렸다. 화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악기의 하나 남은 줄이 희망이다. 그 줄이 남아 있는 한 희망이 있다. 끝내 놓치지 말자.” 리라의 줄이 하나만 남은 것을 볼 때 절망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와츠는 반어적으로 희망을 봤다.

이 그림으로부터 ‘희망’을 강조한 사람이 있다. 미국 전 대통령 버락 오바마(1961~)다. 그는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존 케리 후보 지원 연설을 하며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에 대해 설파했는데, 이후 이 그림을 언급하며 ‘희망’의 가치를 강조했다.

다른 그림은 사회적 테마를 즐겨 그린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야로센코(1846~1898)의 ‘삶은 어디에나’(1888)이다.

‘삶은 어디에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삶은 어디에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수용소로 끌려가는 기차에 갇힌 가족이 있다. 잠시 간이역에 멈춘 시간,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아기는 기차 밖의 새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준다. 먹을 것이 부족할지언정, 가족들은 아기가 새에게 베푸는 자선을 말리지 않는다. 굶더라도 아기가 떠올린 생명에 대한 희망을 잃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람은 모든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희망을 떠올린다. 현재 상황이 힘들수록 더 그렇다. 막다른 길에서 희망마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

어쩌면 제우스는 판도라가 상자를 열 것을 알았고, 희망만이 상자에 남을 것도 미리 알았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제우스는 인간에게 벌을 준 것이 아니라, 꿈을 준 것이다.

희망은 세상을 긍정하는 시작이며 끝이다. 희망은 우리 바깥, 저 너머에 있지 않다. 항상 우리 안에 있다. 하나 남은 리라 줄, 아기 손에서 떠난 음식 부스러기에 ‘거대한’ 희망을 본다. 그래서 그림을 본다.

저작권자 © 법률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