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후안무치(厚顔無恥)’. 낯짝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으로 체면을 차릴 줄 모르고 창피함을 모르는 뻔뻔함을 가리키는 말이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때로는 뻔뻔해야 하고 내일을 위해 오늘의 굴욕도 견뎌야 한다. 하루 아침에 나라가 무너지고 일어나기를 거듭하는 격변의 춘추전국시대를 살아야 했던 중국인들은 ‘후안무치’를 처세의 비결을 넘어 학문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렸다. 청나라 말기 리쭝우(李宗吾ㆍ1879~1944)가 중국사에 등장했던 후안무치한 인물들의 성공 사례를 연구해 선보인 기서(奇書) ‘후흑학(厚黑學)’이 그것이다.

‘후흑학’은 얼굴이 얇아 체면을 버리지 못하고 마음이 맑아 의중을 숨기지 못하면 결국 치열한 생존경쟁의 패배자가 된다며 뻔뻔함과 음흉함을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무기로 추켜세운다. ‘후흑술(厚黑術)’을 구사하기 위한 비기(祕技)는 크게 두 가지로, 뻔뻔함을 포장하기 위한 ‘두꺼운 얼굴(面厚)’과 음흉함을 감추기 위한 ‘검은 속내(心黑)’다.

아내와 자식을 적진에 남겨두고 혼자 도망을 가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던 유비가 ‘면후(面厚)’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 자기가 위험해지면 은인마저 죽여버렸던 조조는 ‘심흑(心黑)’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뻔뻔함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유비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고 이쪽 저쪽 옮겨 다녔지만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필요하면 사람들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속마음이 칠흑같이 시커먼 조조는 은인들을 최대한 이용하고 상황이 바뀌면 가차 없이 배반해 그 속마음을 측근들조차 읽지 못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지난 8일 출석한 송영길 전 대표가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것을 보며 오랜 시간 ‘후흑술'을 연마해 온 고수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는 ‘후흑술’을 이미 최고 경지의 수준까지 체화하고 있었다.

8개월 전 수사가 시작됐을 때 검찰에 빨리 자신을 소환 조사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지난 5월과 6월에는 두 차례나 검찰에 자진 출석하는 퍼포먼스까지 연출했던 그는 정작 검찰이 소환하자 “검사 앞에서 억울한 점을 해명해 봐야 실효성이 없으므로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말을 뒤집었고 13시간 조사 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외곽 후원조직인 ‘평화와 먹고사는 문제연구소(먹사연)’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폐기하며 증거인멸을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도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뗐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검찰 소환 전날에 ‘이봉창의사 역사울림관’을 방문한 뒤 페이스북에 참배 사진과 더불어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투척했던 이봉창 의사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제 자신도 돌아봤다”라고 썼다.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벌였던 의사와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를 돌린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는 자신을 동일시한 것이다. 후흑학에서는 타인은 물론 본인 스스로도 후흑을 알아볼 수 없는 상태, 즉, 몰아의 경지를 최고수 단계로 쳐준다는데 송 전 대표는 이미 그 수준에 오른 듯하다.

사실 우리는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다양한 후흑술을 구사하는 정치인들을 숱하게 목격했다. ▲의혹이 제기되면 무조건 아니라고 발뺌하다가 검찰이 수사를 시작하면 정치적 탄압이라고 우기는 사람 ▲검찰에 가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법정에서 결백을 밝히겠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이 나와도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자신은 무죄라고 우기는 사람 ▲파렴치한 범죄로 감옥으로 향하면서도 비록 내 몸을 구속하더라도 양심과 진실마저 가둘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

송 전 대표에 대한 수사를 시작한 지 8개월여 만인 지난 13일 검찰은 구속영장을 청구했고, 18일 송 전대표에 대한 법원의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이 있을 예정이다. 만약 구속이 될 경우 송 전 대표가 이번에는 어떤 후흑술을 구사하며 위기를 돌파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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