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광환의 미술 산책]

[법률방송뉴스]

카라바지오(1571~1610)는 서양 미술사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이다. 대중에겐 덜 알려진 화가지만, 기인이었고, 천재였으며, 후세에 미친 영향은 그 어떤 화가보다 깊고 넓었다. 보통 그를 이렇게 묘사한다. ‘어둠 속에 살았던 기이한 천재’. 르네상스 양식에 비해 파격적이고, 동적인 감성을 드러내는 예술 경향을 ‘바로크’라고 하는데, 카라바지오는 바로크 미술의 개척자다.

그의 대표작, ‘성모의 죽음’(1605ㆍ루브르 박물관ㆍ그림1)을 보자. 어두운 실내에서 세상을 떠난 성모가 누워 있으며, 베드로 등이 엄숙하게 조의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발표 당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천상의 품격‘이어야 할 성모를 평범한 한 여성의 죽음으로 그렸다. 손과 발이 노출된 채 축 늘어져 있고, 배는 불룩하며, 복장도 허술하다. 심지어 성모의 모델이 창녀였다는 소문도 전한다. 이처럼 성서에 나오는 거룩한 장면을 성스럽지 않게 그렸다. 그의 모델은 뒷골목 사람들, 부랑아, 거지 등이었다.

그림 1. 성모의 죽음
그림 1. 성모의 죽음

 

또 다른 대표작, ‘성 마태오의 소명’(1600ㆍ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ㆍ그림2)도 비슷하다. 세금징수원이었던 마태오를 찾아간 예수가 그를 부르는 장면을 그렸다. 오른쪽에 선 예수가 탁자에 앉아 도박을 즐기던 마태오를 가리키는 장면이다. 성서의 한 이야기를 빛과 어둠의 대비로 농밀하게 그렸다. 서민들을 괴롭히던 세금징수원 자리인 ‘어둠’에서 예수를 따라 나서는 ‘밝음’으로 부르는 장면이지만 그다지 성스럽지는 않다.

그림 2. 성 마태오의 소명
그림 2. 성 마태오의 소명

카라바지오는 명암을 극명하게 대비시켜 주제를 강조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이를 미술 용어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고 부르는데, ‘명암 대비’라는 의미다. 이 기법은 그로부터 시작돼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디에고 벨라스케스, 페테르 파울 루벤스, 조르주 드 라투르, 렘브란트 판 레인 등으로 쉼 없이 이어진다. 그가 서양미술사에서 일군 대표적인 ‘혁신’이다.

또 다른 혁신은 정물화의 지평을 열었다는 것이다. 정물화로 불릴 만한 독립적인 작품은 드물지만, 그가 작품들에서 묘사한 정물들은, ‘살아 있어 손에 만져질 듯하다’라는 평을 얻었다.

하지만 예술적 성취와 별개로 카라바지오의 일생은 기인의 행태를 넘어 패륜의 지경까지 갔다. 툭하면 싸우고 언쟁을 벌이며, 말썽을 피우다 끝내 살인까지 저질러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그의 작품들은 연극의 클라이맥스를 그린 듯한 기분이 드는데, 사실 그의 생애 자체가 밀고 당기는 긴 연극 같았다.

그가 그린 최후의 작품에는 그의 삶이 농축돼 있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1610ㆍ보르게세 미술관ㆍ그림 3)이다. 이보다 강렬한 명암 대비를 찾기 어려운 작품이다. 목이 잘린 골리앗 얼굴 모델은 피폐해진 그의 당시 얼굴이었고, 강인해 보이는 다윗의 모습은 한창 때 그의 얼굴이라고 한다. 주변 하층 이웃들을 모델로 삼다, 끝내 자신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한 폭의 그림에 그렸다는 발상만으로도 ‘천재적 영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3.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그림 3.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                                             

기질 때문에 얼룩진 인생을 살았는지, 험한 생활로 인한 광기 탓에 폭풍 같은 작품을 생산했는지 참 가늠하기 어려운 화가다. 그의 이름, 카라바지오는 그가 자랐던 이탈리아 지명이다. 본명은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지오(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로서 ’카라바지오 지역의 미켈란젤로‘로 불렸던 것이다. 르네상스의 불후의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이름이 같다. 두 사람 모두 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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