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법이란 무엇인가']

[법률방송뉴스]

① 법이란 탈아(脫我)다

법은 한 공동체의 최선을 위해 구성원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禮儀)이며, 더 나아가 공동체 구성원들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는 양심(良心)이다. 인간은 동물이지만, 도시라는 정교한 문화가 다스리는 공간에서 법을 지키기에 ‘신적인 동물’, 즉 ‘인간(人間)’으로 살 수 있다. 나는 ‘법’이란 용어의 변천 과정을, 현생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남긴 동굴벽화에서 시작하여,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에서 틀을 잡아,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말한 기원전 9세기에서 4세기, 소위 '축의 시대', 동서양에서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펼쳐졌는지 살펴보고 싶다.

이 첫 번째 글은, 현생 인류의 조상인 크로마뇽인이 기원전 1만2000년경에 오늘날 프랑스 도르도뉴의 몽티냑 남쪽에 있는 라스코 동굴의 가장 안쪽, 즉 지성소(至聖所)에 남긴 벽화를 통해 살펴본다. 인간이란 동물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 오히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쾌락의 문화를 구축해왔다. 인류는 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도 머지않아, 그들의 주검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누구도 본 적이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실재처럼 상상했다. 바로 ‘사후세계’다. 사후세계는 인류의 고유한 사고 능력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다. 사후세계의 발명으로 인류는 생전에 자신이 저지를 잘잘못을 평가받을 것이라고 염려한다. 이 염려가 인류에게 문명, 문화, 특히 인과응보를 기반으로 한 법의 정신을 고취시켰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부터 30만년 전에 북아프리카 튀니지아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인류학자들은 이곳에서 현생 인류의 DNA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유인원 유골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겉모습은 오늘날 우리와 똑같이 생긴 인간이었지만, 아직 짐승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아직 익히지 못했다. 자신의 욕망과 본능대로 행동하는 짐승이었다. 유럽에는 이미 40만년 전부터 네안데르탈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러시아 툰드라 지역의 데니소바인들과 같은 유인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들은 각자 생존을 위해, 다른 존재들과 경쟁하고, 때로는 전략적으로 제휴를 맺었다.

지금으로부터 3만4천년경, 호모 사피엔스들 가운데, 새로운 ‘인종’이 등장한다. 극소수가 자신의 생존보다는 공동체의 생존, 경쟁보다는 협력, 살해보다는 희생이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절실하다고 깨달았다. 그들은 호모 사피엔스와 물질적인 염기서열은 동일하지만, 정신적인, 그리고 영적인 염기서열이 확연하게 달랐다. 그들이 바로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그 심중에 후대 종교나 문명이 말하는 고귀한 정신인 자비, 사랑, 인과 같은 가치를 품은 자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대부분 아직도 호모 사피엔스라는 범주에서 머물며 짐승처럼 산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벽화가 있다. 구석기 시대 벽화가 그려져 있는 라스코동굴의 지성소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포효하며 죽어가는 황소와 그를 사냥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그림이다.

당시 인류에게 맘모스처럼 큰 동물 사냥은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과 부족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먹잇감을 구하는 일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거대한 산과 같은, 신비한 동물을 사냥했다. 동시에 그에 대한 동정심으로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거주하는 부시맨들은 사슴과 같은 동물이 남긴 발자국을 추적해 독을 바른 화살을 쏜다. 독화살을 맞은 사슴은 서서히 죽어간다. 그들은 동물과의 불가분의 유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죽어가는 사슴을 붙잡고 사슴이 울면 자신도 울면서 죽음이 가져다주는 극도의 고통에 상징적으로 동참한다. 그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동물을 죽여야 하는 행위를 부끄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냥할 동물을 위해 미리 용서를 비는 의례를 행했다. 이 그림을 그린 예술가는 당시 최고의 사냥꾼으로 부족 전체를 위해 사냥해야 했다. 이 그림은 바로 사냥꾼이 사냥을 나가기 전에 자신의 행위를 자연과 생명의 순환에서 보려는 시도다. 혹은 그가 사냥 후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는 의례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에 있는 맘모스의 배에서 창자들이 터져 나온다. 그의 왼쪽 앞다리 끝이 둘로 갈라져 있다. 다리가 흔들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뒷다리는 몸에 비해 너무 가늘어 커다란 몸집을 지탱하기 힘들다. 사냥꾼의 창이 맘모스의 엉덩이 부분에서 시작하여 땅으로 사선으로 그려졌다. 맘모스의 배에서 지금 막 창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맘모스는 고개를 돌려 쏟아져 나오는 창자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맘모스 앞에는 한 사냥꾼이 등장한다. 사냥꾼이 실제로 맘모스 앞에 누워 있는 모습은 아니다. 사냥꾼은 맘모스가 죽어갈 때, 자신도 함께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죽어간다는 연대감을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사냥꾼은 맘모스에 비해 연약하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인 무기와 이성을 통해 맘모스를 제압했다. 사냥꾼의 심리상태는 그의 몸의 모습에서 유추할 수 있다. 오른쪽 다리는 길고 왼쪽은 짧다. 맘모스처럼 사냥꾼의 몸도 해체되고 있다. 자신이 유지하던 정상 상태에서 이탈해 비정상적 ‘엑스터시’ 즉 ‘탈아(脫我)’로 진입하고 있다. 두 팔 역시 두 발과 마찬가지로 길이가 다르다. 오른팔은 왼팔에 비해 길고 굽었으며 손가락은 네 개다. 왼팔은 거의 목에 붙어 있고 뒤틀려 있다. 왼손 손가락도 네 개다.

사냥꾼의 유난히 긴 몸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의 성기다. 사지는 뒤틀리고 얼굴은 보이지 않는데 성기만은 서 있다. 끝이 뾰족하지만 상당한 크기다. 그는 죽음을 통해 생명을, 해체를 통해 통합을, 엑스터시를 통해 부활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사냥꾼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사냥꾼 앞에 있는 새 솟대의 새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면 착용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진입해 태어나기 위한 연습이다. 혹은 사냥꾼 자신이 죽어가는 맘모스를 두 눈으로 차마 볼 수 없어 착용했는지도 모른다. 라스코 동굴 벽화는 인류가 자연과 우주의 정교한 관찰을 통해 그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그들은 이 지성소에서 사냥을 통해 생존해야 하는 자신들의 운명을 깊이 묵상하고, 죽어가는 맘모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을 통해 다시 태어나도록 연습했다. 인류의 조상들은 심지어 동물의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의례를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된 자신에 대해 묵상했다. 인류는 자신이 사냥하는 맘모스와 하나가 되어 엑스터시, 즉 탈아를 연습한 것이다.

법은, 인간이 다른 인간들, 다른 동식물과 어울려 살면서 지켜야 할 도리다. 자기의 이익이라는 이기심에서 탈출할 때, 비로소 구축할 수 있는 자연의 섭리이며 인간의 마땅한 도리다. 법은 탈아(脫我)에서 출발한다.

 

저작권자 © 법률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