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김익태 미국변호사(CIL 외국법자문 법률사무소 대표)는 미국 형사법원 국선전담변호사, 헌법재판소 연구원, 통상교섭본부 자문위원 등을 지낸 외국법자문사입니다. 복잡한 국제 법적 분쟁(국제 형사, 민사, 가사 등)에서 기업이나 개인이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을 실무를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낙엽이 떨어지며 한 해가 끝나간다. 이때 시작하는 것이 있다. 온갖 종류의 송년회다. 예전 같지는 않겠지만, 긴 코로나 시절 이후 첫 송년회 인만큼 많은 모임들이 예상된다. 동시에 많은 음주운전이 발생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차가 없다. 서울 만큼 대중교통이나 택시가 편리한 도시에서 굳이 차를 소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차 없이 사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서 운전을 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city) 내에서만 살지 않고, 외곽(suburb)에 사는 구조이기에 어쩔 수 없다. 맥주 한 두잔 정도 마셔도 운전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한국과 같이 길을 막고 음주단속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음주운전 사건에 경찰력이 마비 될 것이다.

또한 곳곳에 위치한 술집 주차장에 서있는 차량의 운전자들은 모두 잠재적 범죄자들이 될 것이다. 대리운전도 없는 나라에서 술집 앞에서 잠복해 있다가 나오는 차들을 모두 세우면 실적 올리는 건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단속하지 않는다. 땅이 넓어 약간의 음주 후에도 운전할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여건을 고려해서다.

그렇다면 미국에서의 음주운전 단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순찰차가 도로를 다니다가 운전이 불안하거나 차량이 이상한 경우 (차량 후미 등이 꺼져 있거나 하는 경우)에 차를 세운다. 그리고 음주가 의심스러울 경우 운전자를 차에서 내리게 해서 현장 테스트(Field Sobriety Test)를 한다. 영화에서 가끔 나오는 양손 올리고 일자 걷기를 하거나, 한발로 서있기, 또는 손가락을 움직여서 눈동자가 따라 오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알파벳을 거꾸로 해보게 하는 경우도 간혹 있는데, 이건 맨 정신에도 하기 어려워 거의 실행하지 않는다.

미국 형사법원에서 국선전문변호사(Public Defender)로 일할 당시 음주운전 사건을 맡게 되었다. 피고인은 멕시코에서 막 이민 온 평범한 인상의 30대 후반 남성이었다. 경찰에 의하면 이 남성은 음주상태에서 어린 아이와 부인을 차에 태우고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산 후 집으로 가는 중이었고 운전이 불안정하여 뒤따르던 경찰이 차를 세웠다는 것이다. 곧바로 양손 올리고 한발 바로 앞에 다른 발을 연결하여 걷는 '힐 투 토우' (hill to Toe), 한발로 서있기 등의 일반적인 현장테스트를 했는데 피의자가 제대로 걷지 못하여 체포하고 이후 기소했다는 것이다.

기소가 되어 피고인이 된 나의 의뢰인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막 이민 와서 영어가 서툰 그는 그날 저녁, 근처의 무료영어학교에 다녀왔고 부인과 아이를 픽업해서 햄버거를 사서 집에 가는 중이었다는 것이다. 술 좋아하는 나는 애주가들의 인상을 어느 정도 파악한다. 그래서 왠지 그 말에 믿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인은 의뢰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밖에 없다.

헤겔의 정반합의 원리 같은 현대 사법시스템하에서 처벌하려는 검사 측의 입장과 변호하려는 변호인의 입장이 분명히 대립할 때 판사의 판결이 나온다. 의심은 이미 경찰과 검찰이 하고 있는데 변호사까지 동조한다면 이러한 시스템은 성립할 수 없다. 누구나 억울하게 피의자가 될 수 있는 경우가 있으며 형사법의 취지 중의 하나가 99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죄인을 만들지 않아야 된다고 할 때 변호사는 어머니를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피의자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의뢰인은 끝까지 음주 혐의를 부인했고, 사건은 재판으로 넘어갔다. 검사 측 증인은 당연히 수사 경찰관 이었다. 직업적 소신이 있어 보이는 젊은 백인 경찰관이었다. 그는 자신이 합리적인 의심으로 차량을 세웠고 이후에 피의자에게 현장테스트를 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었다.

이제 막 이민 와서 영어가 서툴러서 영어학원에 다니던 사람에게 어떻게 현장테스트에 대한 방식을 설명했냐 하는 점이다. 경찰관은 자신이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를 남미 언어인 스페인어를 했고 간단한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알기에 직접 시범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고 자신있게 증언했다. 나의 질문이 이어졌다. “테스트 중에 일자 걷기 가 있는데, 발가락과 발꿈치를 맞붙이고 일자로 걸어야 된다는 것을 스페인어로 어떻게 설명했지요?” 경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스페인어로 똑바로 걷는 다는 말을 어떻게 합니까?” “스페인어로 발가락과 발꿈치를 뭐라고 합니까?” 한 두 마디의 단어는 알았겠지만, 현장테스트를 정확히 설명해야 하는 정도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경찰은 피의자에게 테스트 방법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채 무리한 수사를 벌인 것이고, 당황한 피고인은 영문도 모른 체 따라 하다 실패했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또한 경찰이 수사절차를 위반하고 취득한 불법증거인 현장테스트 결과는 증거로 채택될 수 없으니 사건을 기각해 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재판부는 나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피고인은 증거 부재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절차법에 좀더 엄격한 미국식 사법제도의 특징을 보여준 사건이다.

그렇다면 당시 경찰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번거롭더라도 경찰서에 피의자를 데리고 가서 통역관을 요청하여 현장테스트를 하던지, 병원에 가서 채혈을 했어야 한다. 형사절차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엄격한 미국에서도 번거로운 일인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절차의 엄격성이 얼마나 지켜지고 있을까?

불법증거를 인정하지 않는 원칙은 우리 사법부도 똑같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부분에서까지 그 절차를 꼼꼼하게 심사하고, 절차 위반에 대해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 궁금하다. 고문과 강압 수사로 동포의 피를 빨던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경찰들이 해방 후 그대로 잔존했다. 독재와 군부시대까지 폭력과 강압수사는 경찰의 일상적인 관행이었다.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절차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며 적어도 자국민에 대해서는 이러한 관행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지만, 다문화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외국인들에게 이러한 절차가 얼마나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지 궁금하다.

영화에서 외국인 피의자들이 한국말을 못하는 척 할 때, 등장하는 경찰의 폭력은 관객에게 통쾌함을 선사한다. 관객들은 그런 범죄자들에게 까지 세금을 낭비하며 통역관을 배정하고, 더딘 수사를 해야하는 것을 보면 답답해 한다. 하지만 우리사회의 약한 고리인 외국인에 대한 절차적 원칙의 위반에 침묵하는 순간 다음 차례는 내국인 사회적 약자들이 될 것이며, 그 다음은 운이 없어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는 평범한 우리 모두일 것이다. 농담처럼 “원칙은 깨라고 있는 거야” 라고 말하지만, 아니다. 원칙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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