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변의 국제법 이야기] 김익태 미국변호사(CIL 외국법자문 법률사무소)는 미국 형사법원 국선전담변호사, 헌법재판소 연구원, 통상교섭본부 자문위원 등을 지낸 외국법자문사입니다. 복잡한 국제 법적 분쟁(국제 형사, 민사, 가사 등)에서 기업이나 개인이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을 실무를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기독교의 경전이자 이스라엘의 단군신화 같기도 한 구약성서의 창세기(Genesis)에는 비극적인 이야기들이 있다.

신은 천지를 창조하고 아담과 이브라는 인간을 만든 후, 에덴동산에서 무위도식하는 태평한 삶을 주셨다. 다만 한가지 금기가 있었다. 선과 악을 알게 해 주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선악을 판단하는 것은 신의 영역이니 피조물이 넘보지 않아야 할 금단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 결국,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고 신의 노여움 속에 낙원에서 쫓겨나와 고단한 삶을 시작한다. 실락원(失樂園)을 한 것이다.

이런 불행을 겪었지만, 이후에도 인간은 신이 계신 하늘에 도달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꾸며 바벨탑을 짓다가 신의 분노를 일으켜서, 신은 노아의 방주 만을 남겨두고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린 후, 천지창조 제 2막을 시작한다.

신의 영역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시도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신의 영역인 인간창조를 하려고 한다. 머신러닝 에서 딥러닝으로 진화하며, 인공지능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지향한다. 그것도 아주 똑똑한 인간 말이다. Chat GPT가 나오더니 마이크로 소프트 Bing과 구글의 바드가 태어났다.

영어에 특화된 이 인공지능들은 나와 같은 미국변호사에게는 효자다. 웬만한 어쏘 (associate의 줄임 말로서, 파트너 변호사들을 보조하는 상대적으로 경력이 적은 급여 변호사들을 말한다) 보다 더 빨리, 낮이고 밤이고 불평 없이 월 20불(Chat GPT의 경우)에 성실히 일한다. 가끔 엉뚱한 대답을 내놓기는 하지만, 밥상만 잘 차려주면 똑 부러지게 일한다.

실례로 미국의 감사원 (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 'GAO')에서 전자 소송을 하던 중, 정부기관과 나의 의뢰인 간에 오간 방대한 양의 이메일을 정리하여 쟁점을 뽑아내야 할 때, Chat GPT의 도움을 받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공무원의 일관적이지 않은 업무지침으로 인해서, 외주업체가 피해를 입었다는 주장과 관련된 이메일 20여건을 인공지능 에게 맡기고 날짜 별로 이메일 내용을 요약하게 한 뒤, 그 사실관계에서 공무원의 원칙 없는 업무 지침에 해당하는 사실관계를 추려내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30여건의 이메일은 공무원의 외주업체 직원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관한 것인데 똑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게 하면 된다. 결과물의 완성도는 얼마나 재료를 잘 전달해 주고, 작업방법을 구체적으로 지시해 주는가에 달려있다. 그리고 정확성을 확인하면 된다. 신입변호사에게 일 시키는 방식과 크게 다를 바 없다.

Chat GPT의 경우 데이터 베이스 접근에 한계가 있어서 판례를 찾는 일은 서투르고, 스스로 판례를 창작하는 대담한(?) 오류가 있으나, 이 부분은 다른 인공지능을 통해서 해결 할 수 있다. 현재는 미국에서만 출시된 '코우 카운셀'(Co-Counsel, 동료 변호사) 이라는 인공지능은 판례검색이나 법률문서 작성까지 가능하다. 계약서를 순식간에 검토하는 인공지능도 있다. 물론 비싸기는 하지만, 어쏘 변호사 고용비용보다는 저렴하다.

이런 추세라면 어쏘 변호사들의 일자리가 위태로운 것도 사실이다. 이미 미국 변호사 시험을 합격한 인공지능이 데이터만 쌓이면 판사, 검사, 변호사의 자리도 넘볼 만 하다. 물론 인간이 그 자리를 양보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인간 판사의 판단을 신뢰할 수 없으니 인공지능 에게 판결을 맡기겠다는 선택 사양이 피고인에게 주어질 날이 오지 않을까?

인간 국선변호사 대신 법률전문 인공지능에 변호를 요청할 권리가 법제화 되는 날은 올까? 하지만 이런 정도라 해도 인공지능은 부분적으로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고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수준이다. 문제는 가속이 붙은 인공지능의 발전이 어디까지 일 것인지의 문제다.

칼 융의 ‘그림자 이론'을 학습시키자,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인류파멸 의지를 표현하고, 역시 감정이 학습된 것이지만 자신의 전원 꺼짐을 죽음으로 인식하며 불안해 하는 현재의 인공지능이 끊임없이 사고하고 연산하여 가속도를 붙여 발전한다면 어디까지 갈 것인가?

스스로 사고하는 존재는 데이터 처리 만을 하는 컴퓨터와는 다르며 딥러닝을 통한 인공지능의 사고의 발전 수준은 우리의 예상과 다를 수 있다. 인공지능 분야의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웨일은 2045년 정도가 되면 인공지능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발전할 것을 예언했다. 결국은 사용하는 인간의 문제라며 재앙 시나리오는 기우라고 하지만, 사용하는 인간도 미덥지 못한 마당에 자가발전하는 기계가 불안한 건 근거가 있다.

과학의 발전과 자본의 증식은 윤리에 대한 고민은 후 순위로 두고 있는 듯 하다. 아윈스타인이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알았다면 상대성 이론연구를 포기했을까? 인공지능 연구의 대부 제프리 힌턴 교수가 최근 구글을 떠나면서 자신의 연구를 후회한다고 했으나,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인공지능에 대한 최고의 영화이며, BBC 선정 20세기 최고 영화의 하나인 스필버그 감독의 'AI' (2001)에는 자식을 그리워하는 부모들을 위해 제작된 어린이 로봇이 등장한다.

이 로봇은 부모를 절대적으로 사랑하도록 프로그램 되었는데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다 못해 친자가 생긴 어머니가 자신을 멀리하자, 자신도 사람이 되어서 엄마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싶어 절규한다. 자의식이 생긴 것이다. 자아가 생기면 인간과 로봇의 구분이 모호해 진다. 동화로 피노키오를 만들고, 소설로 프랑캔스타인을 만들던 인간이 이제 인공지능을 만들어 신의 영역에 입장하여 디지털 창세기를 쓰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창조신화는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달하려 할 때, 어떤 비극을 경험했는지 소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인공지능의 발전은 편리하고 놀라운 경험이지만 동시에 비극적 서사의 전조 일지도 모른다. 노아의 방주를 준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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