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먼저 '분쟁해결' 조항부터 점검하라

[김변의 국제법 이야기] 김익태 미국변호사(법무법인 도담)는 미국 형사법원 국선전담변호사, 헌법재판소 연구원, 통상교섭본부 자문위원 등을 지낸 외국법자문사입니다. "복잡한 외국법이 국내 실무자들에게 쉽게 이해되길 바란다"는 김 변호사가 국제거래에서 발생하는 여러 쟁점들을 칼럼으로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익태 법무법인 도담 변호사
김익태 법무법인 도담 미국변호사

약법삼장(約法三章). "살인하면 사형에 처하고 남을 다치게 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면 죄에 따라 처벌한다." 진나라를 멸하고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이 건국 초기에 수립한 법 이념이다. 과연 정말로 법이 3개만 있었을까마는, 적어도 법의 단순화를 통해 사회의 개혁과 안정을 이루려 했던 당시의 시대정신의 표현일 것이다.

복잡한 현대사회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법적 단순화를 통해 누구나 쉽게 규칙을 이해하고 지켜내자는 측면에서는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법도 많고 어려운데, 계약서마저 복잡하다. 또한, 간단했던 이전의 계약서가 갈수록 그 양이 늘어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영미권 계약서는 몇십 페이지를 예사로 훌쩍 넘긴다. 구글 번역기에 돌려봐도 대체 이 조항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 쉽지 않다. 그 덕에 변호사들은 먹고 살겠지만, 일선의 계약담당 실무자들은 답답할 따름이다. 하지만 약법삼장의 정신으로 계약서의 제일 중요한 몇가지를 점검한다면 적어도 큰 화는 면할 수 있다. 그 첫번째가 분쟁해결 조항이다.

분쟁해결 조항은 통상 계약서의 말미에 위치해 있다. 'Proper Law & Dispute Resolution'(준거법과 분쟁해결)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계약서 검토 요령의 첫번째 연재가 분쟁해결이라니 다소 의아하다. 이는 계약서란 본래 관계가 좋을 때는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문제가 생기면 비로소 한 자 한 자 꼼꼼히 들여다보는 문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합의는 어찌 보면 계약서의 존재이유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분쟁해결 방식을 계약 체결시 정해놓는 것은 결혼 전에 혹시 있을 수 있는 이혼을 대비하여 부부간의 재산 분배 방식 등을 정해놓는 혼전계약서(Prenuptial Agreement)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 내용은 싸움이 생겼을 때, 싸움의 규칙은 무엇이며(준거법), 싸움의 장소(분쟁해결)는 어디인가를 정하는 조항이다.

서구권 계약당사자들이 만드는 계약서는 통상 준거법을 자국법으로 하며 분쟁해결 방법을 자국의 법원으로 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구의 법이 선진적인 법제이며 자국 법원이 선진적인 사법시스템이라는 자부심 내지 오만이 작용한 것일 수 있지만, 또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과 시스템을 이용하려는 본능적인 샅바싸움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많은 경우 상대방의 위치가 우위에 있을 경우 마지못해서 상대방이 제시한 분쟁해결조항에 동의하는 경우가 있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첫째는 좀더 중립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안전하고 또한 이후에 양보할지언정 처음부터 이 중요한 카드를 밀당 없이 포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 당사자가 각각 자국의 법과 법원을 고집할 경우 그 해결방법은 무엇인가? 이 경우, 준거법은 양 당사자국의 법 대신 제3국의 법을 적용하는 것이 중립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의 회사가 무역거래를 시작하려고 한다. 필자가 자문하던 한국의 회사는 미국의 수입업자에게 제품을 납품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바이어가 우위에 있었다. 당연히 상대방은 미국법을 준거법으로 하고 미국법원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미국법이 꼭 한국 회사에게 불리하지는 않을 것이며 현재 많은 미국변호사들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그 자문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중립적인 위치를 점하기 위해서, 나는 싱가포르의 법을 근거법으로 제시했고, 법원 대신 싱가포르 중재원을 분쟁해결처로 제안했다. 한국의 법과 법원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니 미국 회사로서도 자신들의 입장만 고집하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싱가포르 법이 준거법으로, 싱가포르 국제중재원이 분쟁해결처로 결정되었다.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두 회사는 함께 성장해 갔다. 그러다가 미국 내 경기가 나빠지면서 최소수입물량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다. 분쟁이 발생한 것이다. 두 회사의 변호사들은 이런저런 논쟁을 벌이다가 싱가포르 계약법을 들추어 보면서 결국 분쟁을 재판 전에 합리적으로 해결하였다. 싱가포르 법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 다 생소한 싱가포르 법 앞에서 어느 한쪽만 유리하거나 편리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큰 싸움을 피할 수 있었던 측면도 있었던 것이다.

위 사례의 경우 만일 분쟁이 평화롭게 해결되지 못하고 재판으로 이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대로 싱가포르 국제중재원에서 분쟁이 단심으로 해결된다. 이것이 요즘에 유행하는 '국제중재'이다. 일방 당사국의 법원은 타방에게 불리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계약당사자들이 제3국의 중재원에서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다. 중재인들은 1인 혹은 3인이며(이 또한 계약서에 명시한다) 재판관의 역할을 한다. 법원처럼 3심까지 진행하지 않고 단심으로 끝내며 중재의 규칙을 간단하게 정해놓으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서 요즈음 국제계약에서 선호되고 있는 방법이다. 심지어 론스타 사건 같은, 국가를 상대로 투자자가 제기하는 ISD(Investor-State Dispute·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제도) 분쟁도 중재로 결정된다.

전 세계에는 크고 작은 중재소가 산재해 있다. 중재소의 이름이나 중재의 장소는 중요치 않다. 평판이 있고 비용이 합리적인 중재소이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으며, 중재인의 선정이 중요하지 중재의 장소는 중요치 않다. 또한 중재의 대부분은 서면으로 이루어지므로 장소는 큰 의미가 없다.

굳이 법원을 고집한다면, 한국 법원이나 상대국 법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서구의 법원은 비교적 신뢰할 만하니 미국이나 유럽의 법원이 꼭 불리하지는 않다. 다만 미국에 비해 유럽의 법원들은 우리에게 낯설 수 있으니, 상대가 유럽의 법원을 고집한다면 대안으로 양 당사자에게는 제3국인 미국 법원을 제시할 수 있다.

추후 연재에서 다른 주제에 대한 검토 요령을 소개하겠지만, 이처럼 분쟁해결에 대한 부분을 점검하면 큰 불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계약 담당 실무자가 제일 먼저 분쟁해결에 대한 조항을 검토하고 의견을 제시한다면, 상대방에게도 우리쪽의 법적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표현될 수 있을 것이며 이후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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