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法과 세상] 양선응 변호사(법률사무소 인선)가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슈를 책을 통해 통찰하고, 그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봅니다.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양 변호사는 "글을 통해 법의 대중화, 법의 상식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편집자 주

 

양선응 법률사무소 인선 변호사

처벌 뒤에 남는 것들 / 임수희 지음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에 대한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해서 텔레그램을 통해 판매·배포한 이른바 ‘n번방 사건’의 주범 조주빈이 검거되었다. 그의 신상은 신속하게 공개되었고, 그는 포토라인 앞에 섰다. 그는 고개 숙이지 않았고, 그 흔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 감사하다”라는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자기과시적 발언으로 우리를 아연하게 했다. 그는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14개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피고인이 된 조주빈은, 피의자일 때 그랬던 것처럼, 헌법과 형사소송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 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특히 자신에게 유리한 이야기만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법정에서, 언론에서 크게 들릴 것이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피해자는 어디에 있는가? 피해자는 어디서, 어떻게, 어떠한 방식으로, 누구를 향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임수희 판사와 함께하는 회복적 사법 이야기’라는 긴 부제가 붙은 임수희의 '처벌 뒤에 남는 것들'의 문제의식은 위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우리 형사사법 체계가 ‘가해자 서사’로 짜여 있고, ‘응보적 사법’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피해자가 지워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해자 처벌에 몰두한 나머지 피해자가 실종되는 것이다.

피해자의 빈 자리에는 판사와 법원이 들어선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직접 대면해야 하는 부담을 덜고 판사에게 또는 국가에 호소하고 변명할 수 있는 보다 마음 편한 상황이 된다. “형사사법 절차에서 가해자는 피해자의 피해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부당함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들은 피해자의 곤경이 아니라 자신의 곤경에 초점을 맞추게 되고, 형사 절차의 복잡성과 범죄 가해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재판과정으로 인해 자신의 법률적 상황에 매몰될 수밖에 없다."(207~208쪽)

가해자 중심 서사와 응보적 사법을 특징으로 하는 현행 형사사법 체계 내에서는 온전한 형사사법의 실현은 어렵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진정한 형사사법은 피고인의 인권 보장과 피해자의 구제 내지 피해 회복을 모두 제대로 도모하고 실현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행 체계 내에서는 피해자가 객체적·수동적 지위(수사 과정에서는 참고인, 재판 과정에서는 증인)로 전락하게 되어 피해의 회복이나 구제가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회복적 사법의 도입 필요성을 역설한다. 회복적 사법은 피해자의 피해를 금전적으로 보상하자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의 (대체로 그 진심이 의심스러운) 사과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응보적 사법을 대체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회복적 사법’에서 ‘회복’은 범죄로 인해 파괴된 피해자의 일상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형사사법 체계 외부에서가 아니라 체계 내에서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가능케 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자가 제시하는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피해자로 하여금 피해를 말하게 하는 것이다. “가해행위로 인해 어떤 피해를 입었고 그 피해가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 결과가 어떠한지, 그러한 피해가 회복되기 위해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57쪽)를 사법체계의 외부에서가 아니라 ‘내부에서’ 피해자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게 하자는 것이다. 말의 회복과 치유와 재생의 기능을 믿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실제 형사재판을 담당하면서 회복적 사법을 시범적으로 운영해 본 경험을 대화체에 실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러나 현행 형사사법 체계의 한계에 대한 지적은 날카롭고, 회복적 사법 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메시지는 묵직하다.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의 깊이는 가늠하기 어렵다. 가해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과 더불어 피해자의 피해 회복 방법에 대한 고민이 절실한 시점이다. 회복적 사법의 문제의식에 주의깊게 귀기울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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