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에 "낙질도가 심하여"

[법률방송뉴스] ‘낙질도가 심하다‘, 뭐가 심하다는 건지 짐작이 가십니까. 

법률방송 '법률용어, 이제는 바꾸자' 오늘은 ‘낙질도’입니다. 김태현 기자입니다.

[리포트]

조선 초기인 중종 6년, 서기 1511년 채수가 쓴 ‘설공찬전(薛公瓚傳)'이라는 고전 한문소설이 있습니다.

유교를 근간으로 삼는 조선에서 귀신과 저승을 소재로 불교의 ‘윤회 화복설’을 다룬 당시로선 ‘전복적인’ 소설입니다.

소설은 특히 이승에서 왕이었더라도 반역해서 집권한 왕이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불온한’ 내용까지 담고 있습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반정으로 중종을 왕으로 옹위한 세력 입장에선 절대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소설입니다.   

이에 조선왕조실록 중종실록에는 ‘설공찬’이라는 단어가 모두 6번 나오는데 “설공찬전을 소각하다”와 같이 전부 부정적인 내용입니다.

"설공찬전의 내용이 모두 매우 요망하다. 문자로 옮기거나 언어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킨다. 부(府)에서 마땅히 거두어들이겠다"와 같은 내용입니다.

실록의 ‘문자’는 한문을 뜻하고 ‘언어’는 한글을 지칭합니다. 

실록의 ‘언어로 번역하여’는 한문소설을 한글소설로 번역했다는 말로 최초의 국문소설 허균의 홍길동전보다 100여년 앞서 한글로 쓰여진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번역소설입니다.

또 실록의 ‘부’는 사헌부를 지칭하는데 국가의 기율을 세우는 사헌부가 직접 나서 단속하고 단죄했을 정도로 ‘설공찬전’은 ‘위험한 소설’이었고 실제 조선 최초의 ‘금서’이기도합니다.

이렇게 존재만 실록에 기록돼 있을 뿐 그 실물이 전해지지 않던 설공찬전 한글본은 1996년 이문건의 ‘묵재일기’에서 국문 필사본 일부가 발견되며 학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상당 부분이 소실된 상태에서 발견 돼 흥분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안겨줬습니다.

이처럼 훼손되거나 소실된 서책을 표현하는 단어가 우리 법전에 있습니다.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훼손 또는 낙질도(落帙度)가 심하여 원형을 식별하기 곤란한 것으로서..." 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포털 어학사전에 검색해 보니 ‘단본(端本)'이라는 일본식 한자어와 함께 “낙질은 비싸게 팔 수 없다”는 예문이 뜹니다. 

'떨어질 락(落)' 자에 책묶음을 뜻하는 '질(帙)' 자를 쓰는 ‘낙질(落帙)’은 한 질을 이루는 여러 권의 책 중에서 빠진 권이 있는 책을 말합니다.

여기에 ‘어느 정도’ 할 때 도(度) 자를 붙여서 ‘낙질도’는 책이 빠진 정도, 즉 책이 사라지거나 없어져 소실된 정도를 뜻하는 일반 시민들은 좀처럼 그 뜻을 알기 어려운 한자어입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
“확인했을 때 따로 순화어가 있지는 않는데요. 유의어는 좀 많이 있어요. 결본, 그리고 결질, 궐본, 낙질본, 간본, 산질, 영간, 영본, 일질, 잔결본, 잔본 이렇게...“

마땅히 순화해서 쓸 쉬운 말이 없는 가운데 법제처는 문화재청과 협의해 ‘결본이 많다’는 말로 바꿀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법제처 관계자]
“낙질도는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한자어이기 때문에 저희가 협의해서 ‘결본이 많다’라는 것으로 순화를 하고...”

법령을 총괄하는 정부 부처인 법제처 관계자마저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한자어라고 말하는 낙질도.

일반 국민들이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법률방송 ‘법률용어, 이제는 바꾸자’ 김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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