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성인지 감수성 고려해야”... 성폭행 혐의 피고인 '무죄' 선고 원심 파기
"조직폭력배에 성폭행 당해" 주장 여성, 무죄 선고되자 부부가 동반 자살
“여성·피해자 입장에서 판단해야” vs “증거주의 위배될 수 있어” 의견 팽팽

[법률방송뉴스] 자신의 아내를 강간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조직폭력배에 대해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피해 부부가 동반 자살한 ‘논산 성폭행 피해 부부 동반자살’ 사건.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됐다”며 원심 판결을 깨고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는 소식 어제 전해드렸는데요.

대법원이 언급한 ‘성인지 감수성’이 뭐고, 성폭행 사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찬반 논란과 함께 짚어봤습니다.  

'심층 리포트' 장한지 기자입니다.

[리포트]

충남 논산의 조직폭력배 박모씨는 자신의 친구인 A씨 아내 B씨를 A씨가 해외출장을 간 사이 모텔로 불러내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습니다.   

1심 재판부는 그러나 지난해 11월, B씨가 스스로 모텔로 들어간 점 등을 들어 박씨의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남편과 아이에게 해코지를 하겠다는 조직폭력배 박씨의 협박에 어쩔 수 없이 모텔로 간 것이라는 B씨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B씨가 박씨와 불륜 사실이 발각돼 신변에 위협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해 먼저 남편에게 허위로 피해사실을 말했을 여지도 있다”는 것이 1심 재판부 판단입니다.

박씨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에 A씨 부부는 지난 3월 억울함을 호소하며 “죽어서도 복수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동반 자살했습니다.  

그럼에도 2심 재판부 역시 박씨와 B씨가 성관계 뒤 10여분 간 가정 관련 대화를 나눈 점 등을 들어 박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대법원 판단은 달랐습니다.

대법원은 먼저 사건 전후 CCTV에 찍힌 B씨 모습에 대해 “박씨와 신체 접촉 없이 각자 떨어져 앞뒤로 걸어간 것뿐인데 ‘폭행·협박 등이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고 판단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원심 판결을 지적했습니다.

성관계 후 가정에 대해 대화를 한 것에 대해서도 “B씨가 오로지 박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의도로 진행된 대화”라는 것이 대법원 판단입니다.

대법원은 그러면서 "그럼에도 원심이 B씨 진술 신빙성을 배척한 것은 성폭력 피해자의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성인지 감수성’을 결여한 것이라는 의심이 든다”고 원심 판결을 비판하며 사건을 유죄 취지로 대전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대법원은 앞서 지난 4월에도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해임된 대학교수가 낸 해임처분 취소소송에 대해서도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하며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깼습니다.

“성희롱 사건을 심리할 경우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파기환송 사유입니다. 한마디로 가해자나 남성의 입장에서가 아닌, 여성과 피해자의 입장에서 심리하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고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없었다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된다", "우리사회 가해자 중심 문화 등에 비춰보면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에 어긋난다"는 이번 대법원 판시가 단적인 예입니다.

관련해서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지난번 최초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이번 판결에도 반영됐다”며 “아무래도 하급심에서도 그런 기준을 갖고 판단을 하게 될 것”이라고 판결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배복주 / 한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대표]
“성과 관련된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 성별이 불평등하거나 내지는 차별을 받는 그런 요소를 인식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죠. 그것을 인식해야지 감수성이 생기는 거니까...”

반면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지금도 성추행이나 성폭행 사건의 경우 뚜렷한 증거가 없어도 피해자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면 피해자 손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감수성’까지 감안하라는 것은 ‘증거주의’에 위배될 수도 있다는 지적입니다. 

[문정구 변호사 / 법무법인 한길]
“각 당사자의 진술이나 주장이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과정에서는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판단할 필요성도 있는데, 지나치게 피해자나 여성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그런 기준의 제시가 될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하며 잇달아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대법원 판결 경향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나 이윤택씨 등 미투 폭로 관련 사건 재판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안 전 지사 1심 재판부는 “성인지 감수성적으로 고려해도 의문점이 많다”며 안 전 지사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바 있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과 “지금도 충분히 반영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성폭력 사건에 대한 법원 판결 경향이 한층 피해자 위주 패러다임으로 바뀔지 주목됩니다.

법률방송 장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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