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 전국법과대학교수회 회장 · 국민대 교수

조용히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계획으로 새해를 맞아야 할 2016년의 12월이 무척 스산하다.

지금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단어들인 비선 실세, 국정농단, 촛불, 민주주의, 탄핵, 비리, 분노, 수치, 광장...

눈마저 뜸한 한겨울이 한없이 마음을 답답하게 한다.

대통령이 뇌물죄의 공범인지, 강요죄를 범했는지는 헌재의 탄핵심판 과정에서 중요한 쟁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범법(犯法) 혐의보다 우리가 더 성찰해야 할 부분은, 비단 헌재의 심판 대상이 되어 있는 현 대통령만이 아니라, 소위 힘있는 자들, 정치지도자들 모두에게 잠재적으로 해당될 수 있는 혐의인 남법(濫法) 여부가 아닐까.

사전적 의미로 보면 범법은 ‘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남법은 사전적 의미로 ‘법을 함부로 쓰거나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법은 여전히 유효하며, 흔들림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개인과 특정 집단이 그 선을 넘기도 하지만, 그것은 법의 잘못이 아니다. 범법 사실이 밝혀지면 법에서 정한 대로 제재와 책임 추궁이 따른다.

그러나 남법을 행하는 자는 법이 정한 선을 넘지 않는다. 그 선을 그저 마음대로 바꿀 뿐이다. 기준을 바꾸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해악성의 경중을 따진다면 어느 쪽이 더 큰가. 당연히 남법이다.

범법의 경우 제3자의 입장에서 법과 행위자는 분리된다. 범법자에 대한 비난 가능성은 높지만, 법 자체에 대한 신뢰에는 큰 손상을 주지 않는다. 어긴 사람이 나쁠 뿐이지, 법이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법에서는 행위자와 법이 분리되지 않는다. 제3자의 눈에 법은 그저 자의(恣意)와 사익(私益)을 정당화하는 도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남법을 저지른 자는 공동체가 존립할 수 있는 기반인 규범에 대한 신뢰를 파괴하는 자이기에 그 책임은 범법자에 비할 바 아니다. 무지는 변명될 수 없다.

범법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지만, 남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기준을 제멋대로 만들고, 움직이고, 지울 수 있는 정도의 힘과 영향력을 가진 자들만이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이 엄혹한 시련을 하나의 성장통(成長痛)으로 승화시켜,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기 위해서는 정치지도자들이 남법 행위에 대한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고, 국민들은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이들의 일탈 가능성을 감시해야 한다. 선동은 남법의 불길한 징조 중 하나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치주의가 이뤄지지 않는 곳에서는 민중이 집합적으로 최고 권위를 갖게 되는데, 대중에 아첨하는 사람이 명예를 갖게 되면서 선동가들은 만사를 민회(民會)에 맡긴다'면서 '민중의 결정(decree)으로 법률(law)을 뒤엎고, 결국은 한 명이 지배하는 참주정치 비슷한 독재로 흐르게 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광장은 민심의 바다이기도 하지만, 선동가들의 토양이 될 수도 있음을 냉정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분노해 마지않는 실종된 민주주의는 법치주의 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에 시민적 합의가 없다면, 우리는 주기적으로 아주 비싼 값으로, 민주주의의 초보적 교육만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법치주의의 대 전제는 준법(遵法)적 문화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양질의 입법, 숙려의 결과에서 나온 사심(私心)없는 입법을 전제로 한다. 고대 그리스의 한 도시국가였던 로크리스(Locris)에서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할 때 그 제안자는 목에 밧줄을 걸고 나오게 되는데, 만일 시민들이 그 법안의 설명을 듣고 즉석에서 그 제안을 채택하지 않는 경우에는 당장에 교살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법들이 법치주의의 한 장애물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차제에 입법가들의 자질과 대의입법의 한계를 보완하는 근본적인 고민도 해보아야 한다.

거기엔 개헌도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의 법치 수준이 '2016년 이전과 이후'로 한 단계 격상될 수만 있다면, 이 겨울이 그렇게 답답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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