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조선변호사시험 시작으로 고등고시-사법시험으로 개정
제1회 사법시험부터 마지막 59회까지 법조인 2만700여 명 배출
'개천에서 용 나기'... 사시 대신할 새로운 '계층 사다리' 나와야

 

 

[앵커]

조선변호사시험에서 제59회 마지막 사법시험까지, 곡절도 사연도 많았던 사법시험.

눈에 띄는 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사시 제도를 대폭 손봤다는 점인데요.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을 맞은 사법시험 70년의 발자취를 김효정 기자가 ‘카드로 읽는 법조’로 전해드립니다.

[리포트]

1947년 해방된 나라에서 처음 치러진 조선변호사시험.

우리나라 법조인 배출 시험의 시작입니다.

이승만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고등고시령’이 제정되고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이 치러집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첫 법관 임용 시험, 지원자 600여 명 중 16명이 최종 합격의 영광을 누립니다.

6·25 전란의 와중인 1952년 치러진 제2회 고등고시 사법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법조인 이태영 변호사를 탄생시킵니다.

이태영 변호사는 우리나라 여성인권 운동의 산파이자 대모가 됩니다.

1950년부터 1963년까지 16회에 걸쳐 실시된 고등고시 사법과를 통해 배출된 합격자는 모두 667명.

평균 합격률은 1.72%, 고시는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나기’였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의 정권은 1963년 ‘사법시험령’을 제정, 공포하고 같은 해 7월 제1회 사법시험이 치러집니다.

제1회 사법시험 합격자 수는 41명, 당시 사시는 합격 정원제가 아닌 ‘절대 점수제’. 각 과목 평균 60점 이상, 과락이 없어야 합격합니다.

1967년 합격자는 단 5명, 사시 사상 가장 적은 합격자 수라는 기록을 남깁니다.

1970년 법조인력 확대를 위해 정부는 사법시험령을 개정해 합격 정원제를 도입, 매년 합격 인원은 80명 선을 유지합니다.

1980년, 역시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사법시험령을 개졍해 합격자 정원을 300명 선까지 대폭 확대합니다.

사법시험은 청운의 꿈과 야망을 품은 패기만만한 젊은 청춘들의 미래를 위한 도전 그 자체가 되고, 합격자 발표가 나면 동네 어귀엔 ‘경축 누구누구 아들 사범시험 합격’이라는 플래카드가 어김없이 날립니다.

‘신림동 고시촌’이 본격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995년 김영삼 정부도 합격자 수 확대를 골자로 하는 ‘사법 개혁안’을 발표하고, 2001년 ‘사시 합격자 1천명 시대’가 열립니다.

2009년 전국 25개 법학전문대학원 개원, 이른바 로스쿨 시대가 열립니다.

같은 해 “사법시험의 단계적 인원 감축 및 2017년 완전 폐지”를 골자로 변호사시험법이 제정됩니다.

시대가 바뀐 겁니다.

이후 1천명 가까웠던 사시 합격자 수는 매년 큰 폭으로 줄기 시작해 작년엔 109명, 그리고 올해 55명을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 ‘사시 합격자’는 존재하지 않게 됐습니다.

1963년 제1회 사법시험부터 마지막 제59회까지 총 응시자 70만 8천여 명, 그 중 법조인의 꿈을 이룬 이들은 2만 700명 정도입니다.

잉어가 이 관문만 거슬러 통과하면 용이 된다 하며 붙여진 이름 ‘등용문’.

해방 이후 지금까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로 상징되는 계층 이동과 신분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해왔던 사법시험.

조선변호사시험부터 제59회 사법시험까지 사시 70년, 사법시험은 이제 숱한 사연과 영욕을 뒤로 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갈 운명을 맞았습니다.

사법시험이 사라진 시대, 우리 사회는 이제 사시가 상징했던 ‘노력하면 된다’는,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열려있는 계층 이동의 새로운 사다리 마련이라는 숙제를 동시에 떠안게 됐습니다.

법률방송 ‘카드로 읽는 법조’ 김효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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