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분과 보람, 실망과 기대 교차하는 순간 빠짐없이 겪어왔다"

 

 

[앵커] 오늘(22일) 퇴임식을 가진 양승태 대법원장의 법관 생활 42년은 대한민국 사법 현대사와 그대로 궤적을 같이 합니다.

법률방송뉴스 ‘카드로 읽는 법조’, 김효정 기자가 양승태 대법원장의 지난 42년과 우리 사법사의 주요 사건들을 되돌아 봤습니다.

[리포트]

양승태 대법원장은 서울대 법대 4학년이던 지난 1970년 제12회 사법시험에 합격합니다.

연수원을 수료하던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종신 대통령을 꿈꾸며 ‘유신 헌법’을 선포합니다.

양 대법원장이 서울민사지방법원 초임 판사로 부임한 1975년, 대법원은 민청학련의 배후이자 국가전복 기도의 배후라며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불과 18시간 후 이들은 그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우리 사법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판결이라는 ‘인혁당 사건’입니다.

같은 해 박정희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사법 암흑 시대에 양승태 대법원장은 판사로 첫 출발을 합니다.

1986년 제주지법 부장판사로 부임한 양승태 부장판사는 ‘강희철’ 이라는 제주 사람에게 간첩 유죄를 선고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었고, 강희철은 2008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1988년 김용철 대법원장 재임명에 반대하는 판사 300여명의 집단 항명 사태,

이른바 '2차 사법파동'이 터지고 김용철 대법원장은 불명예 퇴진합니다.

양 대법원장의 제주 부장판사 시절 일입니다.

1993년 양승태 대법원장은 법관의 꽃이라는 고법 부장판사에 부임돼 부산고법으로 갑니다.

같은 해 박시환, 강금실 등 서울지법 민사단독판사들이 사법부 개혁을 촉구하는 '3차 사법파동'이 터지고, 김덕주 대법원장은 사퇴합니다.

2002년 양승태 대법원장이 부산지방법원 법원장으로 초임 법원장 자리에 올랐던 그해,

의문사진상규명위는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 조작” 이라며 법원에 재심을 청구합니다.

2003년 양승태 대법원장은 대법원장 직속 조직 법원행정처 ‘넘버 투’인 법원행정처 차장에 임명됩니다.

같은 해 ‘서열과 기수 위주 대법관 제청에 반대’하는 판사들의 '4차 사법파동'이 터집니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대법관에 취임한 2005년, 법원은 ‘인혁당 사건’에 대해 재심 결정을 내립니다.

2년 뒤인 2007년, 법원은 인혁당 사형자 8명 전부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리고 과거사를 사죄합니다.

인혁당 사형 선고 32년 만입니다.

2011년 대한민국 제15대 대법원장에 취임한 양승태 대법원장은 2017년 오늘, 42년 입어온 법복을 벗고 판사봉을 내려놓고 법원문을 떠나갑니다.

‘평생 법관제’ 도입 같은 공이나,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으로 대표되는 ‘제왕적 대법원장’ 논란 같은 과도 이제 다 지난 일이 됐습니다.

법관으로 42년, 대한민국 현대 사법사와 자신의 삶의 궤적을 함께 한 목격자이자 당사자.

[양승태 대법원장]

"수난과 혼란, 기대와 희망이 물결치던 우리나라의 현대사 안에서 의분과 보람, 좌절과 긍지, 실망과 기대가 교차하는 순간순간을 빠짐없이 겪어 왔고..."

양승태와 김명수, 떠나는 사람과 새로 오는 사람.

우리 사법부가 더욱 따뜻하고 국민과 공감할 수 있는 법원이 되길 바라봅니다.

법률방송뉴스 ‘카드로 읽는 법조’, 김효정입니다.

저작권자 © 법률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