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17년 만에 무죄 이끌어 "공익변호사 단체 만들어 더 많은 사람 돕고 싶어"

법조계에서 재심(再審)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다.

가장 보수적인 기관인 법원이 스스로 판결에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뒤집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심은 주로 형편이 어려워 제대로 된 변론을 받지 못했던 사회적 소외계층의 사건일 때가 많다. 변호사 입장에서 말하면 열심히 뛰어다녀봤자 돈이 되지 않는 일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재심 전문 변호사’를 자청하고 나선 이가 있다. 가장 낮은 곳에서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박준영(42) 변호사 이야기다.

대학 중퇴 학력에, '수원 노숙소녀 사건' 재심 무죄를 이끌어낸 스타 변호사였다가, 개인파산 직전 상태까지 갔으나, 자신의 이야기를 알린 '스토리 펀딩'을 통해 이제는 '국민 변호사'로 불리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

그가 처음으로 재심에 도전한 사건은 '수원 노숙소녀 사건'이다.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16세 소녀가 시신으로 발견돼 충격을 준 사건이다. 범인으로 2명의 노숙인과 5명의 청소년이 지목됐고, 이들은 모두 형사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박 변호사를 만난 이들은 억울함을 호소했다. 강압적인 짜맞추기식 수사 때문에 거짓  자백을 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박 변호사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무죄 판결을 위해 애썼고 결국 재심에서 무죄를 입증해냈다. 형사 피고인이 수감 중 재심이 결정된 후 출소해서 재심 공판이 열려 무죄가 된 사상 첫 사건이다.

그런 박 변호사는 이후 ‘파산 변호사’로 불렸다. '수원 노숙소녀 사건' 이후 유명세를 얻어 돈도 벌었지만, 어려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사비를 털어가며 일한 것이 문제가 됐다. 열심히 뛰어나닌 뒤에는 어마어마한 빚이 남았다. 결국 그는 파산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은 수많은 국민들이었다. 파산 위기에 처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지원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소셜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인 '스토리펀딩'에 자신의 사연을 공개하고 도움을 구하기로 한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스토리펀딩' 시작 3일 만에 1억원이 넘는 돈이 모였다. 지난 10월 27일 이미 4억8천500만원을 돌파한 후원금은 5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성원에 그는 이제 ‘국민 변호사’가 됐다. 그러나 “국민변호사라는 호칭은 부담스럽다”며 소탈하게 웃으면서도 자신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부지런히 찾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축하한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최근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사건' 재심에서 17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 기분이 어떤가.

- 일단 기쁘다. 다만 결과가 어떨지에 대한 궁금증이 커야 막상 결과가 나왔을 때 기쁨도 큰 것 같다. 이 사건은 진범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도와준 사건이다. 결과가 어느 정도 예측이 되는 사건이라서 담담한 기분도 들었다.

▲이번 무죄 판결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 억울함을 벗었다는 게 가장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부터 또 해야 할 일이 생긴 것이기도 하다. 사건의 문제점이나 잘못된 부분을 공론화해서 다시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요즘 ‘국민 변호사’로 불리고 있다.

- 부담이 많이 된다. 국민변호사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는 아니다. 조용필씨나 이미자씨 같은 가수를 ‘국민가수’라고 부르는 건 그 분들의 노래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느끼고 기뻐하기 때문이지 않나. 하지만 나는 개인이기 때문에 역량의 한계도 있고 사건 수의 한계도 있을 수밖에 없다. 도움을 바라는 사람은 수없이 많지만 도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사건마다 정의롭게 해결하는 것이 미치는 효과를 놓고 보면 거시적으로 볼 순 있겠지만 해결 가능한 사건 숫자를 생각해보면 국민변호사라는 호칭은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다.

▲어려서부터 평범한 삶을 살진 않았던 것 같다. 대학교를 중퇴하기도 했는데 이유가 있었나.

- 고등학교를 두 번 다녔다. 보통 대학 2학년 때 입대영장이 나오는데 1학년 1학기 마치고 군대를 갔다. 다녀와서 여러 사정이 있어서 복학을 하지 않고 신림동으로 바로 갔다.

▲학교 생활기록부에 ‘준법의식이 부족하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하던데.

- 고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 말도 잘 안듣고 교칙도 어기고 그러니까 이걸 법률적인 표현으로 써버렸다. 규칙을 다 잘 지키는 모범생도 있고 나같은 사람도 있는 것 아니겠나.(웃음)

▲집안이 많이 어려웠다고 하던데, 이런 부분도 사법고시라는 선택에 영향을 미친 건가.

- 내가 아주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고민하고 앞날을 길게 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보다 공부를 더 못했던 애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도 가고 그러다보니 자존심이 좀 상했다. 그래서 성공해야겠다는 마음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대학을 중퇴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겠다고 마음먹는게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 그때 어린 나이였다. 나이가 어리니까 무모하고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고 가정을 갖고 주변의 여러 상황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같은 선택은 못할 것 같다. 그때는 어려서 어떻게 보면 굉장히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사법고시, 꼭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사시를 통해 변호사가 됐으니 사시 존폐 논란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을 것 같다.

-기본적으로 사시가 꼭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법조인 선발 시스템이 어찌됐든 로스쿨로 바뀐 상황 아닌가. 일각에서는 ‘희망의 사다리’라고 하는데 그게 크게 와닿지 않는다. ‘흙수저’ 이야기도 나오는데, 지금까지 사시 출신자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법조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법고시는 수십년 동안 이어져 왔는데 대다수의 법조인들이 약자들을 위해 한 일이 있나. 법조인이 된 이후에도 약자들과 연을 이어가고 활동을 했을 때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나.

물론 사회적 약자들이 법조인이 될 수 있는 창구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건 사법고시가 아니라 예비시험 제도를 통해 변호사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도록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로스쿨과 사법고시가 병행된다면 사시는 제한적인, 아주 적은 수만 선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특권층을 형성할 우려도 있다. 

▲법조계는 학벌에 따라 그룹 같은 게 형성돼 있기도 하다. ‘고졸 변호사’가 발붙이기란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 물론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가끔 서운하기도 했고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일단 우리사회에서 고시라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때문에 당시에는 굉장히 힘든 무시와 서운함이 오히려 내게는 득이 됐다.

여러 재심 사건들을 더 많이 다루게 됐고 결과로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보니 한 사건 한 사건 최선을 다해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력과 경력의 한계가 어떤 결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그 덕에 지금은 질투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무시받지는 않는다. 태생적 부족함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큰 동력이 된 것 같다.

▲처음 주목받은 사건이 ‘수원 노숙소녀 사건’이다. 어떻게 이 사건을 맡게 됐나.

- 수원 노숙소녀 사건은 재심사건으로는 첫 사건이었다. 당시 고용변호사로 월급을 받으며 1년 반 정도 일하다 사무실을 마련했는데, 경력도 짧고 잘 알려지지도 않아서 수임에 한계가 있었다. 주로 국선 사건을 많이 맡았는데 그때 국선사건으로 접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사건이다.

▲그 사건으로 인생이 바뀐 것 아닌가. 처음 사건을 접하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 처음에는 유죄라고 생각했다. 7명이 전부 자백을 했고, 그것도 검사 앞에서 한 자백이 거짓이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아이들을 만나고 현장 사진이나 여러 정보를 찾다보니 점점 무죄라는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이 사건을 잘 해결하면 화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1심에서 유죄가 나오고 나서도 내가 계속해 사건을 맡겠다고 했다.

▲당시에는 형사사건에서 재심 인정을 잘 안 해주던 때였는데.

-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재심을 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일반 사건처럼 잘못된 판결을 다시 받는 게 절차라고 생각했지 이렇게 엄격하게 바라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2심에서 기각을 당하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아마 기각을 안 당했으면 공부도 안했을텐데, 나도 너무 황당했고 대법원에서 반드시 뒤집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열심히 준비했다.

▲이후 꽤 유명해졌다.

- 유명해졌다. 많이 유명해져서 사건도 많이 들어오고 했다. 나름대로 먹고 살 만큼 사건이 들어왔다. 사무실을 운영하는데 어려움도 없었다.

▲그런데 이후 다시 '파산 변호사'로 알려졌다. 왜 그런 상황이 온 건가.

- 일단은 세상의 모든 일이라는 게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남에게 손을 벌려가며 하는 것보다는 공익활동과 영리활동을 병행하는 게 좋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었고 한동안은 두 가지를 병행하기도 했다. 당시 고용변호사 2명을 사무실에 두고 그들에게 돈 버는 일을 맡겼다. 그런데 할 일이 아니더라. 나는 사람들에게 박수받을 일을 하면서 직원들에게는 ‘나 먹여 살릴 돈 벌어오라’고 하는게 양심상 못할 짓이다 싶었다. 혼자서 하다보니 공익활동과 영리활동을 병행하는게 어려워졌다. 그래서 공익 사건들만 맡아서 했다.

▲무모한 선택을 한 것 아닌가.

- 그렇다. 그런데 당시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사건은 모두 공론화가 될 사건이었고 세상이 주목해줄 사건이었다. 세상이 날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없었나.

- 전화나 메일로 지원해주겠다는 사람들 많았다. 그런데 남의 돈을 받는다는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도 쉽지 않았다. 결국 독지가를 기다리는 대신 시민들에게 기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토리펀딩’ 3일만에 1억원 모여…“꿈 같았다”

▲스토리 펀딩 열기가 뜨거웠다. 3일 만에 1억원을 돌파했고 10월27일 기준 4억8천만원이 넘었다.

- 많이 놀랐다. 정말 잠이 안 오더라.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기쁜 일로 인해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만큼 열심히 일 해달라는 당부기도 할 텐데.

- 당연하다. 처음에는 좋다가 이성적으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대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됐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있다.

▲정치권에서 유혹도 있었을 것 같은데.

- 예전에는 연락이 왔었는데 이번 총선 때는 따로 연락온 곳은 없었다. 물론 연락이 온다고 해도 하지 않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긴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많은 분들이 마음을 모아준 상황에서 그분들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당분간은 그분들이 실망하지 않게끔 활동하는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굳이 왜 어려운 재심사건을 골라서 하는 건지.

- 행정법 사건이나 이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려고 해봤다. 그런데 사례를 접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론으로 전문가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원 노숙소녀 사건’ 이후 재심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해외 사례를 찾아보기도 하고 언론을 통해 나오는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재심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곤 한다. ‘이 사람 너무 억울할 것 같다’는 는 생각이 들면 직접 찾아가보기도 한다. 제주도에 간 적도 있었다.

▲재심 사건이 어려운 이유는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기 때문일 것 같다.

- 우리나라 사건기록 보존은 문제가 너무 많다. 원본기록이 다 폐기돼 있고 사본을 찾기도 너무나 어렵다. 또 사람을 찾으려고 하더라도 지문조회 이런 걸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수소문해 알아내야 한다. 학벌이나 인맥에 대한 고민을 했던 게 바로 이런 부분이다. 전문가들이나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다. 내가 대학을 졸업했다면 담당교수에게라도 물어봤을 텐데 그게 안 되니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공익변호사 단체를 만들고 싶어 하나.

- 혼자 힘으로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다.

▲지금도 시도하고 있는 일인가.

- 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게 사람이 모이는 일이다 보니 신중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일은 능력과 열정이 결부돼야 한다고 본다. 그런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 시민단체들 중에 가치나 구호만 주장하는 곳도 많지 않나.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 도와주려는 분들도 꽤 있긴 있다. 문제는 함께할 사람을 결정하는 일이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사건 기록을 함께 검토하고 할 분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건기록에 개인정보가 다 나와 있기 때문에 청소를 도와주겠다는 분들도 무조건 오라고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앞으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있는가.

- 내가 잘하는 분야에 더 공부를 하고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형사사건에서 억울한 피해자들을 돕고 문제점이 있는 부분을 잘 정리해 법 개정이나 제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뉴스 서비스를 시작하는 법률방송에 한마디 한다면.

- 법률은 전문 영역이지만 시민들의 생활 속에 함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법률방송’ 같은 법률 전문 언론이 앞장서서 시민들에게 법을 가깝게 이해할 수 있고, 법제도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있는 교육적인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

 

<박준영 변호사 프로필>

▲1974년 전남 완도 출생 ▲목포대 전자공학과 중퇴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 합격 ▲사법연수원 제35기 ▲대한변협 인권위원회 법률구조단 ▲박준영법률사무소 변호사

 

김경희 기자 kyeonghee-kim@law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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