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국가유공자에 공정한 보훈 체계 마련”
호국영웅들, 참전수당·지원금 모아 생활

[법률방송뉴스]

▲신새아 앵커= 한국전쟁, 제2연평해전이 모두 일어난 6월,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호국보훈의 달로 지정됐습니다. 

지난 6일 제67회 현충일 추념식에선 윤석열 대통령이 호국영웅에 대한 예우를 약속하기도 했는데요. 

그 당시 나라를 지킨 국가유공자들은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김해인 기자가 이들을 직접 만나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리포트]

“이게 다 꿈이었으면 좋겠어. 이따 눈 뜨면 우리 집 안방이고, 난 가방 챙겨서 학교 가고. 어머니랑 형은 가게에 가고...”

지난 6일 1분 묵념으로 시작된 제67회 현충일 추념식.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추념사에서 “국가유공자와 유족들에 대한 공정한 보훈 체계를 마련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국가의 안보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영웅들의 사명이었다면, 남겨진 가족을 돌보는 것은 국가의 의무입니다. 국가유공자와 유족들을 더욱 따뜻하게 보듬겠습니다. 확고한 보훈 체계는 강력한 국방력의 근간입니다. 공정하고 합리적인 보훈 체계를 마련해 조금이라도 억울한 분들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과거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여했던 호국영웅들은 오늘날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서울 금천구에 위치한 6·25참전유공자지원센터.

학교 선생님을 꿈꾸던 스무살 청년은 지리산 공비토벌에 참여하며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지인환 6·25참전유공자회 금천지회 회장 (92세) / 참전 당시 20세]
“전쟁 나가기 전에는 내가 학교 선생을 하려고 그랬었어요. 그랬는데 갑자기 이제 전쟁이 나니까 모든 걸 다 저거 하고서 할 수 없이 하니까. 선생님이 안 된 거 상당히 좀 후회스럽죠.”

사방에서 날아오는 총알로 공포감에 휩싸였다며 당시 상황을 회상하던 지인환 회장.

두려움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총을 쏘던 순간엔 긴장이 풀렸다고 말합니다. 

[지인환 6·25참전유공자회 금천지회 회장 (92세) / 참전 당시 20세]
“딱콩 하고 이렇게 쳐다보면 저기서 파란 불이 올라오거든. 그러면 ‘인민군이 저기 있구나’ 이렇게 아는 거야. 그럼 그걸 보면 몸이 덜덜 떨리는 거예요. 그러면 맞대응해서 그 놈도 총 쏘는데 나도 같이 총을 쏘고 그 때 이제 가라앉아.”

강원도 양구에서 전투 재료를 보급하는 야전공병대 있었던 19세 청년.

[최천환 6·25국가유공자회 금천지회 감사 (92세) / 참전 당시 19세]
“나는 중간에 야전 공병대에 있어가지고 전투하는 저 전방에서 양구에서 왔다 갔다 해서 그러기 때문에 내 목숨을 살렸어요.”

갑작스러운 전쟁으로 전장에 투입됐던 어린 군인들은 총알을 다 쓰자 총이 고장 난 줄 알았을 정도로 짧은 훈련만을 받았을 뿐이었습니다. 

총 한 번 쏴보지도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도 허다해 ‘하루살이 인생’이라는 단어도 처음으로 생겨났습니다.

[최천환 6·25국가유공자회 금천지회 감사 (92세) / 참전 당시 19세]
“최전방으로 와가지고 전투도 별로 해보지도 못하고 (죽고) 그래서 ‘하루살이 인생’이 그 때 유행됐었어요. 그렇게 전투도 못 해보고 죽은 사람이 많아요.”

북한 황해도에서 영어를 배웠던 한 20대 청년은 전쟁 당시 미군부대 소속으로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이병용 6·25국가유공자회 금천지회 부회장 (93세) / 참전 당시 20세]
“밤사이에 다 피난 가서 영등포구에 사람이 하나도 없어 한국 사람이. 그런데 박격포는 펑펑 떨어지는데 병장(sergeant)보고 한국 사람들 다 가는데 왜 우리는 여기 이러냐고. 아주 무섭더라고. 다 죽는 거 아닌가.”

평양의 공업전문학교에서 공부했던 젊은 영웅에겐 어느덧 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월세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이 부회장. 국가에서 주는 수당을 조금씩 모아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병용 6·25국가유공자회 금천지회 부회장 (93세) / 참전 당시 20세]
“한 달에 20만 원씩 내고요. 이거(방) 쓰면서. 국가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가 있어요. 구에서 보태주는 돈, 또 저기 높은 데, 조금 높은 데 이런 데서 해서 여러 군데서 모아가지고. 30만원이고 20만원이고 10만원이고 주면 고마운 거지 뭐.”

강화도에서 용산까지 버스를 운전하며 네 명의 딸을 키워냈고, 아내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뒤 반지하 단칸방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병용 6·25국가유공자회 금천지회 부회장 (93세) / 참전 당시 20세]
“살면서 내 집이 있으면 좋은데 조금 한 2개월 살고 나면 또 주인이 옮기라고 그래. 이사 다니는 게 말도 못해 아주. 버스 운전이나 내가 해가지고 딸들 그래도 그거 가지고 학교 보내는 거 그거 하고, 시집가서 다 하니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렇듯 국가에서 지급하는 참전수당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호국영웅들. 

세상을 떠난 전우들에게 그저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지인환 6·25참전유공자회 금천지회 회장 (92세) / 참전 당시 20세]
“그 때 6·25 전쟁이 나가지고 우리 같이 전쟁에 참가한 전우들은 적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속에서 다 모두 국가를 위해서 산화했잖아요. 그 돌아가신 영웅들에 대해서 그저 명복을 빌고 내가 여태까지 그분들의 뒤를 따르지 않고 살아서 아직 있다는 게 너무 미안하죠. 같이 그 때 죽었어야 됐는데...”

법률방송 김해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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