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변의 국제법 이야기] 김익태 미국변호사(법무법인 도담)는 미국 형사법원 국선전담변호사, 헌법재판소 연구원, 통상교섭본부 자문위원 등을 지낸 외국법자문사입니다. 복잡한 국제 법적 분쟁(국제 형사, 민사, 가사 등)에서 기업이나 개인이 알고 있어야 할 상식을 실무를 중심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김익태 법무법인 도담 미국변호사
김익태 법무법인 도담 미국변호사

도박에 관한 한국의 영화가 '타짜'라면, 맷 데이먼(Matt Damon)이 뉴욕 로스쿨 학생으로 등장하는 '라운더스'(Rounders)라는 미국 영화가 있다. 지루한 법조인과 짜릿한 도박사라는 양 극단의 직업에 재능이 있던 그는 결국 도박사의 길을 택한다. 1998년 개봉 당시 미국 로스쿨에 재학 중이었던 나를 위시하여 포커 좀 칠 줄 안다는 많은 로스쿨 학생들에게 춘몽(春夢) 같은 영화였다.

'타짜'가 화투에 관한 영화라면 '라운더스'는 포커에 관한 영화다. 화투와 포커의 근본적인 차이는 화투는 자기 패를 감추는 반면, 포커는 자기 패를 상당 부분 공개한다는 점이다. 둘 다 도박이니 소위 말하는 '뻥카'가 두 게임 모두 가능하다. 하지만 포커에서는 상대방의 깔린 패가 보이니 무조건적인 '뻥카'는 어렵다.

한국의 소송과 미국의 소송의 차이는 화투와 포커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국제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디스커버리(Discovery) 단계 때문이다. 직역하면 '발견'이라 할 수 있는데, 의역하면 '의무적 공개'라고 할 수 있겠다. 재판 전에 상대방의 패를 보자고 요구하는 과정이다. 패를 보고 '고' 할지 '스톱'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통상은 세 가지 패를 요구한다. 첫째 '서면질의'(Interrogatory)다. 상대방에게 사건과 관련한 질문을 한다. 계약위반 소송이라면 "당신이 계약서를 작성할 때 반품 조건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 근거는 계약서의 어떤 조항인가?" 등의 질문을 할 수 있다. 두 번째 '인정요구'(Request for Admission)이다. 사건의 기본적인 사실관계에 대해서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서면이다. 위의 예시를 이어가면 "당신이 작년 3월 1일에 계약서에 서명했고, 그 계약서에는 반품은 30일 이내에만 가능하도록 명시되어 있음을 인정하시오"와 같은 내용이다. 세 번째 '제공요구'(Request for Production)이다. 자료 공개를 요청하는 것이다. 패를 까라는 것이다. 소송과 관련된 상대방의 자료들을 내놓으라는 요구로서 상당히 광범위한 요구가 가능하나, 상대방은 소송과 무관하다거나 자신의 업무기밀 등을 이유로 들어서 제공을 거부할 수 있다.

이상이 문서를 통한 디스커버리라면, 얼굴 보고 하는 대면 디스커버리도 있다. '증언'(Deposition)이다. 상대방 당사자나 증인(전문가 증인 포함)에 대해서 대면 질문을 하는 것이다. 실제 재판에서 행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서를 하고 속기사를 통해서 기록을 만든다. 재판의 리허설쯤 되는 것이다. 양쪽 다 변호사가 배석하고 실제 재판처럼 '이의'(Objection)를 제기하기도 한다. 여기서 했던 증언은 재판에서 사용되므로 번복하기도 어렵다.

명절에 가족들과 화투를 치면 나는 항상 잃는다. 따는 사람은 항상 형수님이다. "도련님, 남의 패도 봐야지" 하면서 나를 놀린다. 도박에서 내 패만 보고 남의 패를 신경쓰지 않는 것이 하수의 스타일이라면, 고수일수록 남의 패를 잘 읽는다. 디스커버리를 꼼꼼하게 진행하면, 이미 승패의 윤곽이 잡히게 된다. 상대방의 패를 읽어보면 승패에 대한 윤곽이 나온다. 상대방의 패를 보고도 판단이 쉽지 않으면 장고에 들어간다. 영화 '타짜'의 "쫄리면 죽으시든가!"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패색이 짙다면 재판에 갈 일이 없다. 그런 이유로 미국의 재판은 대부분 '합의'(Settlement)로 끝난다. 때로는 판사가 합의를 종용하기도 한다.

2013년 겨울 무역분쟁 사건의 재판을 위해서 의뢰인인 한국 회사의 대표와 뉴욕에 갔다. 뉴욕은 폭설로 길이 막히고 북극 한파까지 몰려와서 유령도시가 되었다. 간신히 연방법원에 도착했더니 나이 지긋한 여성 판사께서 폭설로 법원이 문을 닫게 되었다며 재판을 연기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비행기 타고 한국에서 왔습니다. 또 오기는 어렵습니다!" 강하게 항의를 했다. 판사는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지으며 못이기는 척, 원고인 우리와 두 명의 피고회사 대표를 변호인과 함께 한 자리에 불렀다. 서로 얘기를 해보라면서 간간이 디스커버리 자료에 대한 자신의 의견도 피력하였다. 판결의 예측까지 가능한 시점이었다. 결국,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그날 만족스러운 합의가 이뤄졌고, 의뢰인과 나는 그날 저녁 축배를 들었다.

쫄려도 한판 붙자면 재판으로 가야 한다. 한국은 2008년부터 형사사건에 부분적으로 배심원제를 도입하였지만, 미국의 배심원제는 민사재판에도 가능하며, 그 역사가 상당하여 배심원 선정에 관한 다양한 기법이 발달해 왔다. 배심원 재판의 핵심은 내쪽에 우호적일 것 같은 배심원의 선정이며 그를 위해서는 배심원의 성향 파악이 중요하다. 이러한 목적으로, 성공적인 배심원 선정을 위해 외부 전문업체를 고용하기도 한다. 변호사 출신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그리샴(John Grisham) 원작의 '런어웨이 쥬리'(Runaway Jury)라는 영화가 그러한 내용이다. 배심원은 법원이 위치한 지역에서 무작위로 호출하여 그 중에서 선정한다. 그런 점에서 재판의 장소(Venue)는 판결을 내릴 배심원들이 어느 지역에서 호출되는지를 결정하게 되므로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2012년 세기의 특허재판이었던 애플과 삼성의 재판은 애플의 고향인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진행되었고 배심원은 삼성의 특허 침해를 인정하며 우리 돈으로 5천억원 상당의 손해배상을 판결하였다. 재판은 그 후로도 재심과 항소 등으로 이어졌으나 삼성의 패소는 변경되지 않았다. 동시에 당시 배심원 대표를 위시한 배심원들의 편향에 대한 문제 또한 제기가 되었다. 워낙 큰 소송이니 구설이 많을 수 있겠으나, 언뜻 봐도 삼성에게 유리한 지형은 아니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이상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미국의 소송 전문 변호사들은 불리한 사건임에도 재판까지 가야 할 경우에는 판사 재판 대신 배심원 재판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 "배심원들은 알 수 없어!"라는 말을 하면서. 전문 법관인 판사의 눈에는 법리적으로 명백해 보이는 사건도 배심원 재판에서는 일반인인 배심원의 감정에 호소하거나 그들의 무지를 역이용할 경우 예상 외의 결과를 얻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순기능이 많은 배심원제이지만, 그 역기능도 드러나는 지점이다.

하지만, 불나방처럼 생각 없이 재판에 달려들 수는 없다. "패소하면 항소하지"라고 쉽게 생각할 순 없다. 미국의 항소심은 우리와 달리 사실관계에 대해서는 심사하지 않고 법리적 오류만 심사하므로, 실제로는 우리의 상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심사숙고해도 답이 없다면? 로또 사는 심정으로 혹시 모를 배심원의 운 좋은 판단에 올인하면 안 된다. 쫄리면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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