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변의 국제법 이야기] 김익태 미국변호사(법무법인 도담)는 미국 형사법원 국선전담변호사, 헌법재판소 연구원, 통상교섭본부 자문위원 등을 지낸 외국법자문사입니다. "복잡한 외국법이 국내 실무자들에게 쉽게 이해되길 바란다"는 김 변호사가 국제거래에서 발생하는 여러 쟁점들을 칼럼으로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익태 법무법인 도담 미국변호사
김익태 법무법인 도담 미국변호사

중국 송나라 시대의 문인 소동파의 시에는 기러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의 글 중에 "사람은 가을 기러기 같이 신의 있게 오지만, 일이란 봄날 꿈처럼 아무 흔적이 없다"(人似秋鴻來有信 事如春夢了無痕)는 구절이 있다. 놀고 싶고 일하기 싫은 게 인간의 본능 같지만, 막상 일 안하고 사는 것도 쉽지 않다. 밥벌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를 제외하더라도, 인간에게 일이란 때로는 불안으로부터의 도피이며, 집중을 통한 명상의 대체수단이자, 자아 성취의 방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에 대한 지나친 경도는, 목적과 수단을 바꾸어 인간을 워크홀릭(workaholic) 상태로 몰고 간다.

워크홀릭은 알코홀릭(alcoholic)과 같은 중독이며 병증(病症)이다. 그럼에도, 꿈같이 사라질 일은 신의 있는 사람들보다 우선시된다. 소동파의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어깨에 힘주고 최고 연봉의 대형 로펌에 입사하여 밤낮으로 일만 하던 미국의 변호사들의 이혼율은 일반인의 이혼율보다 높다. 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다.

그렇게 목숨 걸고 하던 일이 '봄날 꿈처럼 아무 흔적이 없게' 되는 경우가 있다. 바로 계약위반으로 인한 계약의 파기 상황이다. 본 칼럼 제2회에서 설명한 계약의 파기(termination)의 결과는 손해(damages)다. 손해를 입힌 쪽에서는 손해를 배상해야 하므로, 영문계약서 작성 시 손해배상에 대해 명문화한다.

손해배상을 청구하려면, 계약위반을 입증해야 한다. 계약위반은 글자 그대로 계약서에 나와 있는 조항을 이행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보증(warranty)의 위반이다. 상품이 규격에 맞지 않거나 완전한 소유권의 이전이 아닐 때 발생한다. 한데, 어떤 경우에는 이러한 워런티가 없이 계약이 체결되는 경우도 있다. 급한 마음에 상대방을 믿고 가는 경우일지 모르겠으나 최악의 상황이며 꼭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워런티 조항이 있더라도, 워런티에 제한을 두는 경우가 있다. 국제거래에서 발생하는 상황인데, 국가마다 워런티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계약서에 분명히 명시한 워런티(express warranty) 외에 내재적 워런티(implied warranty) 등에 대해서는 보증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워런티 제외(exclusion of warranty) 조항이다. 통상 책임의 면제(disclaimer)라는 제목의 워런티 제외조항은 분명하게 표시되어야 한다. 워런티 조항 바로 다음에 뜬금없이 영문 대문자로 굵게 좌우여백 없이 등장하는 조항이다. 대부분 비슷하지만, 표준약관으로 간주하여 넘어가지 말고 검토 후 추가적인 보증이 필요할 경우 워런티 조항에 추가해야 한다.

워런티의 제외와 함께 손해배상에 대한 제한(limitation of damages)이 있다. 우리 사법제도에서와 같이 손해배상의 종류가 많지 않고 그 한도가 높지 않은 경우에는, 이런 조항이 흔치 않은데, 미국과 같이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을 포함한 손해배상의 종류가 많고 그 한도가 높은 경우에는 꼭 등장하는 조항이다. 직접손해(compensatory damages)만 보상하고 간접손해(consequential & incidental damages)나 징벌적 손해를 피하려는 의도다. 이 역시 워런티 제외조항 다음에 좌우여백 없이 굵게 영문 대문자로 등장한다. 국내의 수입업자와 미국의 제조사 간의 계약 시, 미국법이 준거법이고 관할법원도 미국 법원이라면, 국내 수입업자로서는 피해야 할 조항이다.

마지막으로, 보상(indemnity) 조항이 면책(hold harmless) 조항과 함께 영문계약서에 자주 등장한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조항이다. 손해가 발생하면 그에 맞게 배상을 해 주면 될 텐데, 별도의 보상 조항을 두고, 직접손해 이외의 여타의 상황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한다.

한국의 K사가 K-뷰티의 바람을 타고 바이오 화장품을 특허 개발하여 미국의 A사에 납품한다고 가정해 보자. A사는 혹시나 소비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비하여 꼼꼼한 워런티 조항을 요구했다. 임상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K사는 A사의 워런티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추가적으로 A사는 계약이행과정(상품의 양도 및 소비자의 사용)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 K사가 A사를 면책(hold harmless)하고 모든 손실(any and all losses)에 대해 보상할 것을 요구했다. A사가 상품 인도 후 보관상의 부주의로 상품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말이다. 독박조항이며 대표적인 불공정 조항이다. K사가 동의하지 않자, A사는 그렇다면 K사의 과실로 인한 손실에 대해서 보상할 것을 제안했다. 일견 합리적인 것 같지만, 함정이 있다. 과실이 온전히 K사의 몫일 때(sole negligence)에 보상하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이 조항에 의하면 A사의 공동 과실도 K사의 책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희생양 조항이다. 이 또한, K사가 거부하자, A사는 그러면, A사의 중대과실(gross negligence)이 아닌 경우에는 K사가 보상할 것을 제안했다. 이 또한, 문제는 있다. 중대과실이라는 높은 수준의 과실에 대한 입증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상 조항은 변수가 많고 그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계약서의 손해배상(damages) 조항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보상 조항을 굳이 계약서에 둘 필요가 있는지 검토해야 하며, 두어야 된다면 그 범위를 협소하고 명확하게 해야 한다. 계약의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양자의 보상 조항을 동일한 문장으로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봄날 꿈같이 사라질 일에도 이처럼 많은 신경이 쓰이는데, 신의 있게 돌아올 사람에게는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야 할까를 생각해 보며, 중요 주제를 중심으로 한 총 4회의 '국제거래 영문계약서 검토'를 마친다. 실무 담당자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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