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변의 국제법 이야기] 김익태 미국변호사(법무법인 도담)는 미국 형사법원 국선전담변호사, 헌법재판소 연구원, 통상교섭본부 자문위원 등을 지낸 외국법자문사입니다. "복잡한 외국법이 국내 실무자들에게 쉽게 이해되길 바란다"는 김 변호사가 국제거래에서 발생하는 여러 쟁점들을 칼럼으로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김익태 법무법인 도담 미국변호사
김익태 법무법인 도담 미국변호사

BBC 선정 21세기 100대 영화의 하나인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는 러시아 영화가 있다. 탐욕스러운 시장에게 자신이 살던 집을 강제수용 당하게 되는 주인공. 형제와 같은 변호사 친구를 모스크바에서 불러와 법으로 싸워보지만 지고, 그 와중에 부인은 변호사 친구와 불륜에 빠진다. 발각이 되자 변호사는 떠나고 부인은 자살한다. 설상가상 주인공은 부인 살인범으로 몰리고, 이 모든 일을 감당할 수 없어 마을의 가톨릭 신부에게 "왜냐"고 묻는다. 신부는 기독교 경전인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욥'이라는 인물에 대해 얘기한다. 자신에게 닥친 이유 없는 고통에 대해서 신에게 따져 묻던 욥에게, 신은 선문답을 주며 '리바이어던'이라는 바다괴물을 언급한다. "네가 낚시로 리바이어던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라고.

16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가 쓴 책의 제목으로, 국가사회라는 거대 권력을 상징하는 리바이어던은 영화에서 주인공을 삼키는 괴물같은 그 무엇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무엇이 왜 주인공을 삼키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의인의 고통'(혹은 '이유 없는 불행')이라는 오래된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은 결국 없다. 살면서 자신에게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치는 이유 없는 불행에 대해 인간은 답을 찾아보려 하지만 찾을 수 없다. 종교 경전은 선문답 외에는 단서를 주지 않고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가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암시만 줄 뿐이다.

이와 유사한 주제가 국제거래에서도 발생한다. 그리고 법은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영문계약서에 등장하는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이다. 계약 당사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해 계약의무 이행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조항이다. 천재지변, 전쟁, 폭동과 기타 당사자가 통제 불가능한 사유가 이에 해당한다. 통상은 이 조항에 대해서는 표준약관식의 조항을 두고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천재지변이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벼락맞거나 로또에 담청될 확률 정도다. 한데, 그런 확률이 발생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그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전세계적 전염병의 창궐(팬데믹·Pandemic)로 인해 많은 국제거래가 중단되거나 연기되고 있으며, 계약상의 의무 또한 면제되기도 한다. 한데, 전염병의 창궐을 천재지변의 한 종류로 계약서에 명기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국내 K사의 사업장이 코로나 바이어스로 인해 임시 폐쇄되었다고 가정하자. 제때 미국의 A사에 제품을 납품하지 못한 K사가 전염병을 이유로 들어 면책을 요구한다. 하지만 영문계약서의 불가항력 조항에 전염병을 명시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A사는 한국의 K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다. 불가항력 조항에 나와있는 '신의 행동'(Act of God)이 전염병을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해 볼 수는 있으나, 명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불가항력 조항이 생략되어 있는 경우에는 꼼짝없이 계약 위반이 되고 만다. 절대로 생략하면 안 되는 조항이다.

결국 A사가 K사를 상대로 소를 제기한다고 가정해 보자. 계약서에 준거법은 한국법, 분쟁해결장소는 한국법원으로 정해놓았기 때문에 K사는 은근히 안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불가항력의 종류를 법으로 정해놓지 않은 성문법 국가인 한국의 법원에서는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근거하여 '자연재난'은 불가항력으로 인정하지만, '사회재난'에 포함되는 전염병의 확산은 불가항력으로 인정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법원이라면 어땠을까? 판례법 혹은 보통법(Common Law) 국가인 미국 법원은 오히려 전염병의 확산을 불가항력으로 인정할 가능성이 있다. 이 점에서 준거법은 그 중요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된다(본 칼럼 1회 참조).

지금과 같은 팬데믹 상황이 어느 정도 더 지속되리라 예상되는 시점에 국제거래 영문계약서를 작성한다고 가정해 보자. 당연히 양 당사자 모두 불가항력 조항에 Covid-19을 명시하려고 할 것 이다. Covid-19이라는 특정 전염병을 명시한다면 어느 나라의 준거법이든 상관없다. 계약은 양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한 약속이기에 당사자들끼리 정하면 그만이다. 따라서 영문계약서에 Covid-19이라는 특정 전염병 혹은 전세계적 창궐(Pandemic)이라는 명시를 하는 것이 안전하다.

하지만 계약서에 전염병을 명시했다고 프리패스는 아니다. 전염병이 이미 창궐하는 시점에서 작성한 계약서이므로,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에 주의하여(precaution) 철저한 예방을 통해 의무 불이행 상황을 피하고,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적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reasonable efforts to mitigate)을 다하지 않는다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수 있다. 계약체결 시점에 전염병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피해 가능성 또한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팬데믹으로 전 세계가 정지한 지난 1년 동안 불가항력을 쟁점으로 한 크고 작은 계약위반 소송들이 발생했다. 미국 일리노이주의 식당 내 취식금지 명령으로 월세를 낼 수 없게 된 프랜차이즈 식당의 경우에도 불가항력 조항이 인정이 되었다(히츠 레스토랑 그룹 사건, In re Hitz Restaurant Group, 2020 3월). 또한 불가항력 상황이 지속될 경우, 계약을 해지해도 되기 때문에 계약해지를 요청하는 소송도 발생했다(피블라 항공 사건, Fibula Air Travel v. Just US Air, 2020년 10월).

한국에서도 불가항력 조항을 쟁점으로 하는 소송들이 발생할 수 있다. 당국의 영업제한으로 인한 손실을 이유로 들어, 임대차계약의 월세 면제 등을 위시한 여타의 계약 관련 소송들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대비해서 평생에 한 번쯤 발생할 만한 천재지변 상황일지라도 불가항력 조항에 대해서 꼼꼼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결국, 삶은 예측 가능한 것들로만 채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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