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묏비나리' 백기완과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묏비나리' 백기완과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 유재광 기자
  • 승인 2021.02.15 1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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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통일 운동가, 정치인, 거리의 투사, 문필가, 시인... 백범 김구와도 인연

[법률방송뉴스] 평생을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헌신해 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오늘(15일) 새벽 영면에 들었습니다. 향년 89세.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는 함부로 발걸음을 어지러이 하지 말라. 오늘 ‘뉴스 사자성어’는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얘기해 보겠습니다.

백기완. 1932년 일제강점기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백홍렬과 어머니 홍억재 사이에서 4남 2녀 중 넷째로 출생했습니다.

조부인 백태주는 장련면에서 알아주는 천석꾼 부자로 3·1운동 당시엔 수천장의 태극기를 제작해 은율 사람들에게 나눠주었고, 1922년 장련농민공제회 창립회장으로 재임하는 등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아버지 백홍렬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재직한 바 있고, 장련청년동맹 위원을 지내며 청년운동에 관여하는 등 당시 전형적인 민족주의 인텔리였습니다.

백태주와 백홍렬, 두 부자는 1934년 삼남지방 수해 당시 의연금을 기부하고 구율에 힘쓰는 등 이른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지만, 백태주가 독립군에 군자금을 대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 고문 끝에 옥사 당한 뒤 가세가 급격히 기울게 됩니다.

그러나 그 정신은 고스란히 백기완에 전해져 백기완은 평생을 불의와 맞서 싸우는 삶을 삽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월남한 백기완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 초까지 농민 운동과 빈민 운동, 전쟁으로 피폐해진 산을 되살리는 산림녹화 운동에 매진합니다.

그리고 백기완은 1964년 당시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합니다.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한 백기완은 1974년 ‘유신 철폐 100만인 서명 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됩니다.

1975년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1979년 10·26사건 한 달 뒤인 11월 24일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하는 ‘명동YWCA 위장결혼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백기완은 또 투옥됩니다.

이후에도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는 등 백기완은 투옥과 석방을 반복합니다.

한때 80kg이 넘었고 힘이 장사였던 백기완은 잦은 고문과 투옥이 되풀이되면서 몸은 반쪽이 됐고,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됩니다.

지난 2018년 4월엔 심장 관상동맥이 막혀 9시간이 넘는 큰 수술을 받았지만, 백기완은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며 저술과 사회참여 활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지난 2019년엔 너도 잘 살고, 나도 잘 살고, 다 함께 올바로 잘 사는 대동세상, ‘노나메기 세상’에 대한 염원을 그린 ‘버선발 이야기’를 출간했고, 같은 해 태안화력 비정규직 고 김용균씨의 장례식장을 찾은 백기완은 마른 몸으로 김용균씨의 영정 앞에서 울었습니다.

민주화 운동가이자 통일 운동가, 거리의 투사이자 1987년과 1992년 대선에 직접 출마한 정치인이기 전에, 백기완은 ‘장산곳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펴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티브가 된 시 ‘묏비나리’를 쓴 시인이기도 합니다.

‘묏’은 묘나 산을 뜻하는 우리말 방언이고, ‘비나리’는 마당굿이나 풍물, 또는 마당굿이나 당산굿, 무당굿 등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는 순우리말입니다.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 띄우는’이라는 제목의 이 149줄짜리 장시(長詩)에 ‘사람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는 저 유명한 구절이 나옵니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눈 덮인 들판을 걸을 때에는 함부로 발걸음을 어지러이 걷지 말라.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오늘 내가 딛은 발자국은 훗날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서산대사의 시라는 얘기도 있고 순조 때 이양연이라는 사람의 시라는 말도 있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평소 마음에 두고 있는 시로 ‘백범일지’에도 실려 있습니다.

백범은 서거 한해 전인 1948년에도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20자 친필 휘호를 남겼는데, 현재 백범의 친필 휘호는 지난 2018년 유족들의 기증으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인 여민관 복도에 걸려있다고 합니다.

백기완의 조부 백태주가 일정에 쫓기던 백범을 숨겨주는 등 백기완 가문과도 인연이 깊었던 김구 선생은 해방 후 서울에서 만난 홍안의 백기완에게도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다섯 글자를 직접 써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온 백기완 선생이 오늘 오전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향년 89세.

‘맨 첫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라고 시작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티브가 된 백기완 선생의 시 ‘묏비나리’는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띠기에 일생을 걸어라’로 마지막 148행, 149행을 끝맺고 있습니다.

엄혹한 시절 목숨을 걸고, 변절과는 무관하게 발걸음 어지러이 하지 않고 일생을 한결같이 살다 영면에 든 백기완 선생의 삼가 명복을 빕니다. ‘뉴스 사자성어’였습니다.

 

유재광 기자 jaegoang-yu@law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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