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수치심, 단순 부끄러움 아닌 분노·공포 등 여러 감정 포함"
"본인 의사로 노출했어도 몰래 촬영하면 성적 수치심 유발 신체"

▲유재광 앵커= 버스에서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몰래 촬영했습니다. 성폭력처벌법 위반일까요, 아닐까요. 장한지 기자와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일단 사건 내용부터 볼까요.

▲장한지 기자= 사건 자체는 어떻게 보면 단순합니다. 버스 안에서 한 남성이 레깅스를 입고 있는 한 젊은 여성의 엉덩이 부분이 포함된 하반신을 8초가량 몰래 촬영한 사건입니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14조 1항은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사람의 신체를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자'를 처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1심 재판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 부분을 유죄로 판단해 벌금 70만원과 24시간의 성폭력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습니다.

▲앵커= 이게 2심에서 무죄로 뒤집어진 거죠.

▲기자= 그렇습니다. "몰카 촬영을 당한 피해자가 입고 있던 레깅스는 여성들이 즐겨 입는 평상복이다", "평상복 차림의 여성을 무조건 '성적 욕망'이나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대상이라고 볼 수 없다", "따라서 해당 몰카는 부적절한 행동이긴 해도 성폭력처벌법 위반은 아니다"라는 게 2심 재판부 판단입니다.

쉽게 말해, 레깅스 입은 여성을 촬영한 게 성적 욕망이나 성적 수치심을 일으키는 촬영이 아니어서 성폭력처벌법 위반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의 판결입니다. 이 사건과 비슷한 일이 이전에도 있었는데요. 2013년에 남성 유모씨가 6개월간 스키니진이나 스타킹, 레깅스 등을 입은 여성을 상대로 무려 49건의 몰카를 찍은 혐의로 기소됐는데요. 1심은 49장 전부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2심은 48장은 무죄로, 단 한 장만 유죄로 판단했는데요. 그나마도 대법원은 그 단 한 장마저도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 한 바 있습니다. 전부 무죄라는 게 대법원 판결입니다.

▲앵커= 쉽게 납득은 잘 안 되는데, 몰카 찍는다고 다 성폭력처벌법으로 처벌받는 게 아닌가 보네요.

▲기자= 당시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부적절하고 불안감과 불쾌감을 유발한 것은 분명하지만, 촬영된 신체 부위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사람들 관점에서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게 당시 대법원 판결입니다.

"피해자가 '주관적'으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해서 다 유죄가 아니고, 촬영된 신체 부위 자체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인데, 당시 여성계 등의 반발이 컸습니다. 성폭력 피해전문 이은의 변호사의 말을 한 번 들어보시죠.

[이은의 변호사 / 이은의 법률사무소]
"보통 버스나 지하철에서 뭘 찍었는데 정말 팬티까지 속옷을 치마 속에 넣어서 찍고 이런 정도가 아니면 약간 다리를 찍는다거나 하체를 그냥 찍거나 혹은 예를 들어 굉장히 노출이 심한 여성을 길바닥에서 찍었어, 그런 게 되게 많아요. 그러면 그런 게 인정이 잘 안 되고 항상 피해자의 입장이 밀렸단 말이죠, 이런 부분들이..."

▲앵커= '버스 레깅스' 대법원 판결이 오늘 나왔는데 2심 무죄를 깨고 다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 했죠. 판결 사유를 좀 볼까요.

▲기자=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법원 1부 김선수 대법관이 주심인데요. '의정부 버스 레깅스 사건' 피고인에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의정부지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판결 핵심 키워드는 '성적 수치심'입니다.

갈래는 두 갈래인데요. '레깅스 입은 여성의 신체를 성적 수치심이나 성적 욕망을 일으키는 촬영의 객체로 볼 수 있느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피해 여성이 느낀 감정을 성적 수치심으로 볼 수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두 개 다 성적 수치심에 해당한다"는 것이 오늘 대법원의 판결입니다.

▲앵커= 뒤의 것부터 볼까요. 피해 여성이 느꼈던 감정에 대해 대법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판단한 건가요.

▲기자= 판결문에 따르면 일단 피해자는 경찰 조사에서 "기분이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라고 진술했습니다. 이 진술에 대해 2심은 "피해자 진술이 불쾌감이나 불안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불쾌하고 불안했을지는 몰라도, 그게 곧 성적 수치심은 아니라는 것이 2심 판단인데, 대법원은 2심 판단이 잘못됐다고 지적했습니다.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의 의미에 대해 먼저 "피해자가 성적 자유를 침해당했을 때 느끼는 성적 수치심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분노·공포·무기력·모욕감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성적 수치심의 의미를 협소하게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이 표출된 경우만으로 한정하는 것은 피해자가 느끼는 다양한 피해 감정을 소외시키고 피해자로 하여금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을 느낄 것을 강요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대법원 지적입니다.

성적 수치심의 '수치심'을 사전적 의미의 수치심으로 한정할 게 아니라, 다양한 층위에서 피해자의 처지와 관점을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 판결 취지입니다. 이런 기준과 취지에 따라 판단하면, 해당 피해 여성이 성적 수치심을 느낀 점이 인정된다는 것이 대법원 판단입니다. 이은의 변호사의 말을 다시 들어보시겠습니다.

[이은의 변호사 / 이은의 법률사무소]
"피해자가 성적 자유 침해를 당했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라는 게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만이 아니라 분노, 공포, 무기력, 모욕감 등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만약에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했는데 '수치심이 들었어요'가 아니라 '무서웠어요'라고 해도 이것은 그럴 수가 있는 것이라는 걸 다 포괄하는 말이 된 거예요."

▲앵커= 레깅스 복장 여성이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의 대상이나 객체인지 여부에 대해선 어떻게 판단했나요.

▲기자= 네, 이 부분은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란 특정한 신체의 부분으로 일률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촬영의 맥락과 결과물을 고려해 그와 같이 촬영을 당했을 때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피해자가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드러낸 신체 부분이라고 하더라도 이를 촬영하거나 촬영 당했을 때에는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이 대법원 판시입니다.

이 사건에 경우 피해 여성이 엉덩이를 포함해 하반신 굴곡이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었다고 해서 본인이 성적 수치심을 느끼진 않았겠지만, 그 모습을 다른 누군가, 다른 남성이 찍어서 본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객체가 된다, 이런 취지의 판결입니다.

예를 들면, 바닷가에서 비키니 입었다고 비키니 입은 여성이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하면서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다른 누군가 그걸 몰래 찍었다면 비키니 입은 여성의 신체는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가 된다는 판결입니다. 이은의 변호사의 말을 다시 들어보시겠습니다.

[이은의 변호사 / 이은의 법률사무소]
"내가 언제 어디서 성적 대상화가 되고 있는지 조차를 파악하기도 어렵고 파악이 됐지만 처벌하기도 어려웠던 이런 상황에 대해서 지금 대법원이 성적 자유에는 피사체가 갖는, 사람이 갖는 성적 자유에는 '나를 성적 대상화 하지 마'라는 의미까지 포함된다는 거예요. 이 외연을 확장한 거예요. 경종을 울려주는..."

▲앵커= 상당히 의미가 있어 보이는 판결이네요.

▲기자= 네, 대법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설명자료를 내고 "이번 판결은 성적 자유를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에서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로 확대한 최초의 판시"라고 의미를 밝혔습니다. 앞서 이은의 변호사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요.

대법원은 "피해자의 다양한 피해감정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성적 수치심의 의미에 대해서 전면적인 법리 판시를 했다"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성폭력 범죄에 대해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한 대법원 판결에 이어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를 천명한 의미 있는 판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앵커= 법리고 뭐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몰카는 무조건 안 찍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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