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사법부의 '재판 지연' 현상... "재판독립 강조, 사법책임 도외시하지 않았나"
물건너간 사법개혁, 다음 정부서 추진되어야 할지도... '공정한 재판' 실현이 초점

​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라고 하는 법언(法諺)이 있다. 올바른 결정이라도 그것이 너무 늦어지면 올바르지 못함으로 귀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오래된 말이다.

미국의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한 말 속에도 녹아있고, 법률가인 문재인 대통령이 이 말을 한 적도 있다.

법에 관한 이 격언은 재판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어쩌면 가장 잘 들어맞는 경우이다. 생각해보자.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 하급심에서 포인트를 놓치거나 매너리즘에 빠져 유죄를 선고하고, 천신만고 끝에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판결을 받은 끝에 구제되는 사건이 심심찮게 보도된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시간이 경과하고 난 뒤의 일이다. 청춘의 피고인이 반백의 늙은이가 되어 감방에서 나온들 그에게 남은 인생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 것인가.

민사재판도 마찬가지다. 송사에 휘말려 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하는 것은 드물지 않다. 나중에 승소한들 수중에 남은 것 하나 없이 빈털터리가 된 후다. 물론 이나마 진실을 밝히고, 구겨진 정의라도 얻는 것은 극히 소수의 혜택 받은 사람에 한한다.

그런데 재판은 어느 한 심급에서 부당하게 지연되기도 한다. 이것은 아주 흔히 발생한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판결문 쓰는 데 자신감을 잃어버려 가급적 판결선고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판사도 드물지만 있다.

오래된 이야기이나 참고로 한 번 말해보자. 어느 시골 지원장이 쓰기는 싫은데 억지로 판결선고를 하기는 했다. 이렇게 하여 판결문을 쓰지 않은 사건이 쌓여 엄청난 규모에 이르렀다. 승소한 채권자가 집행문을 부여받으려고 하였으나 판결이 존재하지 않으니 이를 부여해줄 수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치게 되었다. 감독기관인 지방법원 본원에서 다른 판사를 급히 파견하여 주문에 맞게 판결문을 사후에 썼다.

이런 예도 있다. 이것은 그리 머지않은 과거의 것이다. 판결문 쓰기를 꺼려하는 판사가 있었다. 이 판사는 쓸데없이 작은 꼬투리를 잡아 자꾸 재판을 다음 기일로 넘겨버린다. 원, 피고 양측의 간청에 의해 결심을 해도 선고기일에서 다시 납득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변론재개를 해버린다. 이렇게 해서 2년간 민사단독판사를 하며, 임기 내내 제대로 된 판결 한 건 선고하지 않는 판사도 있었다. 그렇다. 의제자백 사건을 제외하고서는 단 한 건의 판결도 선고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법정에서 원, 피고 혹은 그 대리인들이 쌍방 함께, 재판장에게 사건의 승패를 떠나서 제발 판결만 내려달라고 읍소하다시피 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도 그 판사는 냉정하게(?) 판결을 선고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처럼 일부 문제법관들에 의한 과도한 재판 지연의 예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전국적인 현상으로 번져났다. 코로나가 본격적인 유행을 시작했을 때 재판이 휴정기간에 들어가기도 한 탓도 있고, 아무래도 마스크를 쓰고 하다 보니 원활한 재판 진행이 어렵기도 하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이 작용하는 것 같다.

며칠 전 어느 법조인 모임에 갔다. 전직 판사들의 모임이었다. 그 중에는 법원장을 지낸 이도 몇이나 있었다. 화제 중 하나가 요즘 법원에서 재판을 질질 끈다는 것이다. 심지어 첫 기일에 어렵게 들어가고서도 1년 정도 아무런 심리 없이 방치된 사건의 경험담을 말하는 법원장 출신도 있었다. 법원장 출신이 이런 고충을 얘기하는데 일반 다른 변호사의 경우는 어떻겠는가. 그리고 그 모임에서 전반적인 주조는,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의 법원 운용에 그 책임을 돌리는 것이었다.

잘 알다시피 김명수 대법원장은 취임 후 기회 있을 때마다 ‘재판의 독립’을 거듭거듭 강조해왔다. 이것이 각 재판부의 사건처리에 지나칠 정도로 재량을 부여, 아니 적절한 상위기관의 감독을 거의 포기한 것으로 연결되어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었다.

그러나 김명수 대법원장은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사법의 독립’은 물론 귀중한 가치이다. 그러나 ‘사법의 독립’과 함께 ‘사법의 책임’이라는 다른 하나의 지주를 더 세워 양대 지주 위에서 궁극적으로 ‘공정한 재판 실현’을 보장한다고 하는 것이 세계의 트렌드이다. 김 대법원장의 지나친 재판독립의 강조는 이것을 도외시한, 어찌 보면 우물 안 개구리 식의 편협한 시각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지금 이 시각에도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땀 흘리는 많은 법관들이 존재한다. 앞에서 든 예들은 예외적인 일들이다. 왜 이런 일반화될 수 없는 사례를 들어 법원을 비판하는 것이냐고 꾸중하면 사실 할 말이 없다. 다만 국민들 눈에는 이런 희소한 사례가 결코 호수 위에 뜬 나뭇잎 하나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호수 속에 가라앉은 수많은 나뭇잎의 일부로 보이게 된다는 점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헌법재판소는 1999. 9. 16. 판사에게 신속히 재판을 해야 할 어떠한 법률상의 의무나 헌법상의 의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판시(98헌마75 사건)했다. 이는 우리가 가지는 상식과는 많이 떨어진 것이다. 또 우리 헌법 제26조에서는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까지 규정하였다. 이 헌법 조문을 살리지 못한 결정이다.

물론 반대의 취지로 판시했을 경우 그것이 몰고 올 엄청난 파장을 우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연된 재판이 현저히 부당한 것이라면 그로 인한 기본권 침해를 구제해주는 식으로 결정했어야 마땅하다.

지금 국민들의 사법불신은 심각하다. OECD 37개국 중 한국의 사법신뢰도는 꼴찌이다. 어쩌면 사법개혁은, 현 정부에서는 물건너갔지만 차기 정부에서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추진되어야 할지 모른다. 향후 사법개혁의 과정에서는 어떻게 하면 ‘공정한 재판’이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 진지한 노력들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재판의 부당한 지연을 방지할 실효성 있고 강한 대책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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