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신평 변호사·공정세상연구소 이사장

윤석열 검찰총장의 거취는 이제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런데 그는 지난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사법농단’ 사건의 수사책임을 서울중앙지검장으로서 맡았다. 이때 준 강한 인상이 검찰총장 발탁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현 정부는 지난 정부에 대한 도덕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성립된 것이고, 그리고 그 우월성은 사법농단 사건에서 가장 극적으로 체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이뤄지고 있는 사법농단 사건의 재판에서 검찰은 유죄 입증에 상당한 애로를 겪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양승태, 고영한, 박병대 등 피고인들에게 대거 무죄가 선고될지도 모르고, 그러면 현 정부의 기반이 흔들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러면 왜 사법농단 사건의 재판 전망이 뚜렷하지 않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피고인들의 행위 중 강제징용 사건 등이 과거 어느 정부에서건 관례대로 이루어진 일의 범위 안에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청와대와 대법원이 정책협의체를 구성하여 수시로 의견을 교환하는 일 따위는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랜 기간 이어져온 것이다. 이것을 두고, 권력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사법 혹은 재판의 결과를 마음대로 주물러왔다고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심각한 의문을 넘어서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그리고 권력과 대법원 측의 사법농단이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재판거래’나 ‘재판개입’의 실체가 어렴풋하기만 한다. 결정적 한 방이 없다. 그것은 재판거래나 재판개입의 대상인 재판을 한 판사의 고백이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많은 일선의 판사들이 이에 관련되었음에도 지금까지 단 한 건의 고백도 없다. 더욱이 당시 수사를 하고 있던 검찰의 압수수색영장 청구는 이례적으로 대거 기각되었다. 그 기각들은 법원의 치부를 상세히 까발리지는 말라는 법원의 강력한 의사표시였다. 그리하여 증거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은 면이 있다. 그때 적지 않은 국민들은 흥분하여 소리쳤다. “아니, 판사들은 양심도 없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헌법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고 하였다. 수십년 간에 걸쳐 법원, 사법부는 이 조항을 금과옥조로 내걸며 자신들의 권한 확대를 꾀하여 왔다. 상당히 성공하였다. 사법부는 그들만의 철옹성을 이루었고, 간간이 ‘사법독재’의 한탄이 터져나왔다. 이것은 ‘사법의 독립’과 함께 ‘사법의 책임’을 양대 지주로 내세워 ‘공정한 재판’의 시스템을 확보한다는, 세계 법학의 트렌드와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문 중 ‘양심’이란 단어의 뜻이 문제된다. 심판의 준거로서 ‘독립하여'라는 말 외에 중첩적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것의 해석을 둘러싸고 한국의 헌법학자들은 객관적 양심설과 주관적 양심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치하여 그 중에서 객관적 양심설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헌법 제103조에서 말하는 양심은 ‘법조적·객관적·논리적’ 양심이라고 한다. 말은 그럴싸한데,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양심이면 양심이지 무슨 법조적·객관적·논리적 양심이 따로 있단 말인가?

객관적 양심설은 어느 법관이 사형폐지론의 신념, 양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 법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하는 것이라는 점을 주된 논거로 든다.

이에 반하여 주관적 양심설은 헌법 제103조의 양심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양심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 그러나 사형폐지론자인 법관이라 하더라도 헌법 제103조가 말하는 ‘법률’에 따른 재판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사형을 선고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부담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재판의 공정성을 담보하는 헌법 조문에서 '법관의 양심'을 준거의 하나로 넣은 헌법 조문은 세계에서 한국과 일본밖에 없다. 그런데 객관적 양심설을 취하는 견해는 우리와 비슷한 헌법 조문을 가진 일본에서도 이것이 통설이고 판례인 듯이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오류이다. 일본에서 이처럼 우리 식의 난해한 개념인 객관적 양심설을 취하는 견해를 발견하기 어렵고, 최고재판소의 판례는 명백히 주관적 양심설을 취하였다.

객관적 양심설을 취하는 경우, 가장 큰 문제는 부당한 청탁이나 부정한 목적을 가지고 법관이 재판을 하는 경우에도 이를 그것이 말하는 모호한 ‘양심’의 범주에 넣어버릴 염려가 크다는 것이다. 사법농단 사태에서 그것과 관련되었을 많은 법관들이, 과거로부터의 타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양심’의 가책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것에서 이것이 실증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법관의 양심이라고 해서 일반인의 양심과 다르지 않다. 다를 수가 없다. 그들도 법복을 벗으면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한 여성의 지아비가 된다. 헌법 제103조는 인간적 보편성으로서의 양심을, 어쩌면 이를 명기함으로써 좀 더 엄격한 양심을 법관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사법농단 사태 전반의 과정에서 진실을 숨기고 애써 침묵을 지키는 것은 법관의 양심에 어긋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저나 현 정부 측에서도 사법농단 재판이 점점 암울해지는 현실을 마주하며, 관련 법관들을 탄핵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 것 같다. 그러지 않으면 현 정권의 정통성 위기가 밀어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관련 법관들 행위의 당부에 관하여, 법원의 좁은 울타리 내가 아니라 거대한 공론의 장이 마련될 것이다. 이때 ‘법관의 양심’이 주요 논쟁으로 떠오를 것이다. 국내외의 예를 잘 살펴서, 이젠 다소 허황한 ‘객관적 양심설’에서 탈출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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