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읽는 法과 세상] 양선응 변호사(법률사무소 인선)가 우리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슈를 책을 통해 통찰하고, 그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봅니다.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양 변호사는 "글을 통해 법의 대중화, 법의 상식화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편집자 주

 

양선응 법률사무소 인선 변호사

페스트 / 알베르 카뮈 지음

기승을 부리다가 다소 잠잠해지는 것 같았지만, 다시 살아나 그 자취를 쉽게 감출 것 같지는 않다. 코로나 바이러스 얘기다. 전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환자를 만들고,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개인적으로는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치명적인 질병이고 대규모 학살이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는 외출이 어렵고,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는 것도 주저하게 되고,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하게 된다. 이동이 제한되어 있지는 않지만, 심리적으로는 발이 묶인 기분이다. ‘사회(적)’와 ‘거리두기’라는 친하기 어려운 두 낱말이 함께 묶여 준수해야 할 생활수칙으로 공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전염병, 대규모 사망, (심리적 혹은 실제적) 봉쇄. 자연스럽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호명되는 나날이다. 물론 마스크와 방호복으로 중무장하고 목숨을 걸고 일선 의료현장에서 싸우고 있는 의료인들과, 바이러스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잠도 잊은 채 체계적 방역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방역당국 공무원들을 생각하면, 집에 숨어 한갓 소설책을 읽으면서 코로나가 만든 절망적인 현실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한가하고 사치스러운 일로 느껴진다. 

그러나 김현 선생의 생각에 기대어 변명하자면, 문학은 우리를 억압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것과 싸울 것을 요구한다. 이 잔인한 코로나 시대에 카뮈의 '페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만든 한계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 한계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던져진 혹은 드러난 질문들과 마주해보자는 것이다. '페스트'의 주인공인 의사 베르나르 리유가 194X년 페스트로 인해 봉쇄된 알제리의 한 도시 오랑에서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는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했다. 폭리 취득을 위한 마스크 매점매석, 한 종교집단의 광기에 가까운 비이성적 행동,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와중에도 욕망을 좇아 유흥주점과 클럽에서 전염병 확대에 일조한 사람들. “질병이 확대되면 도덕도 역시 헐렁해지는 것"(161쪽)일까.

반면 코로나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지역이기주의를 넘어 우한 교민을 품어준 아산 시민들의 성숙한 시민의식, 일상을 포기하고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현장의 의료인들과 방역당국 공무원들의 자기 헌신, 코로나 종식을 위한 정부의 정책과 지침을 자발적으로 준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국민들. 어쩌면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401쪽)지 않을까.

우리나라가 비교적 방역에 성공하고 있는 것은 개인정보의 철저한 확보와 신속하고 전면적인 동선 공개 덕이다. 이와 같은 조치가 없었다면, 우리도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다수의 사망자가 생겼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등과 같은 인권이 상당부분 제한되거나 침해된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생명은 절대적인 가치이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권리가 제한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유보 없이 동의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덜 중요해 보이는 가치를 희생하는 일이 계속 용인되다 보면, 언젠가는 더 중요한 것으로 보였던 가치조차 ‘어쩔 수 없다’는 분위기 속에서 희생될 수 있다. 헌법적 차원에서 생명권과 기타 기본권의 충돌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보다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코로나는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일자리 감소에 대비하기 위한 방책으로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정부와 지자체의 긴급재난지원금, 재난기본소득 등의 일시적 지급이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적 위기는 항상 그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노린다. 금융소득이나 이자소득으로 생활할 수 있는 사람보다 현장에서 육체노동을 해야만 생계가 유지되는 근로자에게 코로나가 더욱 치명적이고 위협적일 것임은 자명하다. 지금과 같은 위기는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반복될 것이다. 기본소득제에 대한 전면적이고 철저한 논의가 요청되는 시점이다.

페스트가 종식되고 봉쇄와 격리가 해제되어 서로 얼싸안으며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기 속에서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최전선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페스트와 싸웠던 베르나르 리유는 “적어도 가끔씩은 기쁨이라는 게 찾아와서 인간만으로, 인간의 가난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사랑만으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보람을 주는 것은 정당한 일"(391쪽)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로 인해 누구나 힘들어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즉 우리들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페스트(코로나)는 각자의 문제다. 그러니 각자가 자기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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