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이 짖어도 철마는 달린다 - '준법투쟁'이란 무엇인가
규정이 짖어도 철마는 달린다 - '준법투쟁'이란 무엇인가
  •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전 홍보실장
  • 승인 2020.02.1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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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법투쟁"이 투쟁의 수단이 되고 위협이 되는 한국사회
대한민국은 법과 규칙을 안 지키는 것을 전제로 돌아가나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전 홍보실장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전 홍보실장

1970년대 레슬링 선수 김일은 국민들에게 IMF 시절 박찬호나 박세리, 지금의 류현진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존재였다. 중계가 있는 날이면 TV가 있는 동네 부잣집 마루가 비좁아 여름이면 마당에 있는 평상까지 그득 찼다. 그런데 경기 내용을 보면 김일은 늘 상대 선수가 교묘히 팬티 속에 숨겨 둔 병따개 같은 물건으로 가격당하고 링 밖에서 간이 의자 같은 것에 맞아 피를 흘리거나, 여러 명이 조가 되어 싸우는 경우 심판의 눈을 피한 링 밖의 대기 선수에게 얻어맞아 허우적거리다가 마지막에 그 강한 돌 같은 머리로 경기를 뒤집어 이겼다.

경기가 난장판이 되어 무효가 선언되는 아주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스토리는 거의 예외가 없었기에 사전 각본이 있다, 없다를 두고 어린이들 사이에도 어른들 사이에도 늘 논란이 있었으니 산타클로스처럼 영원히 답을 찾지 못하는 화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모든 선수가 이런 반칙을 쓰지 않고 경기를 하기로 하면 어떻게 될까? 아마 그런 재미와 호응, 흥행은 불가능하지 싶다. 반칙, 불법이 성공 요인이다. 하지만 이 레슬링 경기야 어차피 게임이라 결과가 실제 상황에 끼치는 영향이 크지 않지만, 차원이 다른 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드물지 않게 벌어지고 있으니 위험천만한 일이다.

지난해 11월 철도노조는 임금 정상화와 인력 충원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는데 첫 투쟁 방법이 준법투쟁, 다른 말로 ‘법대로 하겠다’였다. 국민은 이제 이 단어에 상당히 무감해져 도대체 무엇을 갑자기 지키겠다고 하는 건지, 역으로 지금껏 지키기로 했던 어떤 일을 안 지켜 왔는지에는 관심이 없으니, 보도하는 언론도 거의 없다. 오로지 운행률이 떨어져 철도가 더 붐비거나 시간이 더 걸릴 나의 출근시간이라는 결과만이 관심사다.

어느 매체는 “철도노조의 투쟁 명령 행동지침에는 '출고 열차 점검 철저히 시행, 정차역 정차시간 준수, 승강문 열림이나 소등 불량 시 조치 후 발차, 차량 불량내역 철저한 등록, 뛰지 않고 안전하게 순회, 열차가 많이 지연될 시 차내방송 시행' 등이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역으로 해석하면 그동안 저 일들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용자도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지키기를 강요하지 않았다. 단순히 강요하지 않거나 눈 감은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을 것을 전제로 전체 열차 운행계획을 세웠다. 그러니 저 노조의 (준법) 행동지침을 지킨 결과 열차 운행률은 첫날 92.2% 다음날은 78%로 떨어졌다.

이후 전면 파업을 거쳐 노사는 합의안을 마련하고 노조는 파업을 끝냈다. 78%까지 떨어졌던 운행률이 지금은 당연히 100% 주변을 맴돌 것이다. 출고점검은 대충 하고, 정차역 정차시간은 최대한 줄이고, 승강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거나 소등이 잘 안 되더라도 그냥 운행하고, 차량 불량내역도 대충 등록하고, 순회는 뛰어다니면서 건성으로 하고, 열차가 많이 지연되더라도 차내 방송을 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수많은 준법투쟁을 경험했다. 그때마다 그동안 어떤 규정(칙)을 무시해 왔는지 당사자들의 고해성사를 듣게 된다. 그러다 분규가 타결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고해성사 내용은 가톨릭 사제의 고해성사 규칙에 의해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지고 이전까지 무시해 왔던 규정은 다시 계속 무시된다.

철도공사만 해도 100% 정부가 출자한 공기업이라 감사원의 감사 대상 기관이다. 검찰은 위법 사항을 인지하면 직권 수사해 위법 사실이 확인되면 기소해야 한다. 경찰은 물론이고 노동부 등은 한정된 범위나마 사법경찰권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모두 신자의 고해성사를 들은 가톨릭 사제들인가?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을 전제로 운영되는 사회. 법과 규칙을 지키는 일이 위협도 되고 또 투쟁의 수단도 되는 사회, 그곳이 대한민국이다. 법을 잘 지키는 나라가 좋은 나라인자,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지키거나 무시하는 유연한 나라가 좋은 나라인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아무리 규정이 짖어도 철마는 오늘도 선로 위를 꿋꿋하게 달린다.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전 홍보실장 ltn@law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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