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전 홍보실장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전 홍보실장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건과 지금도 진행 중인 조국 전 법무부장관 관련 사건을 겪으면서 대중들이 법과 법 제도에 대해 지금처럼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싶다.

대중매체들은 연일 소환, 영장, 기소 같은 일반적인 용어는 물론이고 뇌물죄, 증거능력, 구인, 공범, 공소장 변경처럼 보통 사람들은 정확한 의미조차 파악하기 어렵거나 또 굳이 알 필요도 없는 어려운 것들까지 엄청난 양의 법률용어들을 쏟아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법의 홍수에 빠져 허우적거린다’라는 표현이 결코 과하지 않을 성싶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아주 착하게 사는 사람을 두고 칭찬으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 명제가 성립 가능하다면 역으로 ‘법 없이는 못 살 사람’이라는 표현도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아주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법 없이는 못 살 사람’이 ‘아주 악한’ 사람은 아니지 싶다. 세상에서 가장 가진 것이 없고 가장 약한 사람이 그가 아닐까? 아니면 역설적으로 혹시 법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그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같은 논법으로 ‘법 없어도 살 만한 세상’이나 ‘법 없으면 살기 힘든 세상’은 가능하며 또 가능하다면 어떤 모습일까?

보통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과연 어느 정도 법과 관련이 있을까? 스스로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또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법은 늘 상수(常數)로 존재하는 것이니 어쩌면 이런 문제 제기는 황당하리만치 비논리적일지도 모르겠다. 보통 사람은 누구도 대부분의 일상 행위에 대한 법적 의미를 따져 판단하고 결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구든 특별한 상황에 맞닥뜨리면 누군가가 나서서 그 행위들의 드러난 법적 의미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 숨은 의미까지도 낱낱이 파헤쳐 따져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세상은 과연 바람직한 세상인가?

조선 영조 때의 학자 김천택이 약 400년 전에 편찬한 시조집 ‘청구영언’에 실린 580수의 시조 가운데 작자 미상의 이런 시조가 한 수 있다.

“말하기 좋다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

이 이름 모를 작자가 환생한다면 지금 세상을 두고 ‘법으로써 법 많으니 법을 말까 하노라’고 외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법 없어도 살 만한 세상’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한낱 환상에 불과한 일인가? 법이 문제인가, 아니면 사람이 문제인가? 여하튼 보통 사람에게는 소란스럽고 성가신 이 시간이 너무나 길어 짜증이 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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