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전 홍보실장
박한규 대한법률구조공단 전 홍보실장

“나이가 몇 살이건, 고향이 어디건, 어느 학교를 나왔건, 지난날 무슨 일을 했건,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능력이 있는데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소개서를 써서 사서함 X호로 보내라.”

1971년 어느 일간지에 실린 구인광고다. 근 반세기 전 글인데도 여전히 신선하다. 우선 군더더기가 없고 하고자 하는 말이 깊숙이 와 닿는다.

저렇게 뽑은 사람들에게 잿빛 바지와 감색 블레이저를 입히고, 샘소나이트 하드케이스를 들려 판 것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다. 피아노 한 대에 12만원 하던 시절에 18만3천600원짜리 영문 백과사전을 팔았는데, 그 중에는 훗날 웅진그룹을 만들었던 윤석금도 있었다.

위 문구를 쓴 이는 브리태니커 200년 역사상 첫 동양인 지사장을 거쳐 우리나라 출판계에 지금까지 깨지지 않은 전설 같은 기록을 여럿 남긴 책 ‘뿌리깊은나무’를 만든 한창기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미8군에서 미군들에게 성경과 항공권을, 이후 허영에 가득 찬 이들에게 흰색 장정의 저 비싼 책을 팔아 ‘개같이 번 돈’으로 1976년 최초의 가로쓰기, 한글 전용의 책 ‘뿌리깊은나무’를 발간하는 일에 ‘정승같이 썼다’고 스스로 술회했다. 험프리 전 미국 부통령이 “내가 만난 비영어권 출신 중에 가장 영어를 잘한다”고 했던 그의 우리말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고 그 애정과 엄격함은 ‘뿌리깊은나무’와 그 뒤를 이은 ‘샘이깊은물’에 오롯이 반영되어 많은 이들은 지금도 그 두 책에 구사되었던 표현법에 야릇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 그가 ‘뿌리깊은나무’ 1978년 7월호에 “대한민국 헌법의 뜻은 이러하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유신헌법 제45조 1항 ‘大統領이 任期가 滿了된 때는 統一主體國民會議는 늦어도 任期滿了 30일 전에는 後任者를 選擧한다’를 이렇게 고쳐 썼다. ‘새 대통령의 선거는 늦어도 그 전임자의 임기가 끝나기 서른 날 전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한다’로. 고쳐 쓴 글은 공백을 포함해 원문보다 한 글자가 적다. 과연 어떤가? ‘서른 날’이라는 다소 생경한 단어를 빼고는 훨씬 부드럽고 의미도 잘 전달된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를 “어리석은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것을 많은 사람에게 기록하여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 이면에는 기득권 세력인 사대부 양반들이 권력을 독점하는 가장 중요한 기반인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파괴하고자 하는, 인간 중심의 민주적 의도가 있었음은 굳이 세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문법의 탄생도 별로 다르지 않다. ‘사람에 의한 통치’가 아닌 ‘법에 의한 통치’는 권력자의 마음이나 인식과 같은 주관적 기준이 아니라 문자화된 법이 명시한 객관적 기준에 의해 국가 공권력의 집행이 결정되므로 누구든 예측 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는 인간 중심의 민주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의 법은 그 본래 취지에서 점점 멀어져 가는 느낌이다. 고등학교를 중간성적 정도로 마친 우리나라 국민이 우리나라의 법조문을 읽어 얼마나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까? 그 객관적인 기준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 결과인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을까?

법은 법조계 종사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쉽게 보통 사람들의 말로 쓰여야 한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은 법의 내용을 공유하는 일이 시작이고, 또 그 이전에 그 법은 보통 사람이 읽어 그 뜻을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야 한다.

법무부가 ‘민법 가족편(친족·상속편)’의 일본식 표현을 개선하고 어려운 한자를 한글로 바꾼 알기 쉬운 개정안을 개정안을 11월 22일 국회에 제출했다고 한다. 많이 늦었지만 의미있는 노력이라 평가한다. 앞으로 제정되는 법들은 모두 누구나 읽어 쉽게 뜻을 파악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지기를, 그리고 기존의 모든 법들도 민법 개정안처럼 곧 고쳐 쓰이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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