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폽토시스'와 진시폐소(陳時弊疏)... 박근혜의 적폐와 문재인의 적폐
'아폽토시스'와 진시폐소(陳時弊疏)... 박근혜의 적폐와 문재인의 적폐
  • 유재광 기자
  • 승인 2017.05.08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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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와 적폐, '이기적 불멸성' 추구 공통점... 도려내지 않으면 전체가 죽어

2013년 2월 25일.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묻혀 있는 현충원을 찾습니다.

대선 당선인들이 당선 다음날, 그리고 취임식 날 현충원을 참배하는 건 오래된 관행이기도 합니다.

현충원 충혼탑을 참배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방명록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깁니다.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으로 희망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

 

문.화.융.성. 어디서 많이 듣고 있는 말입니다.

592억원 뇌물죄 피고인이 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순실이 주도한 미르·K스포츠 재단에 재벌들이 건넨 돈과 관련해 ‘문화융성’ 정책 차원이었지, 사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는 '셀프 변호'에 등장하는 말입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것이 취미였다’는 최순실의 그림자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 첫 날, 첫 행보, 현충원 참배 방명록에서부터 스민 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게 ‘40년 지기’ 박근혜·최순실의 ‘동거정권’이 시작됐던 겁니다.

결과는 헌정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에 대한 헌재 파면 결정과 검찰 구속, 조기 대선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면 대통령 박근혜의 후임을 뽑는 19대 대선. 정치권에선 ‘적폐 청산’ 논란이 뜨겁습니다.

오차범위 바깥에서 각종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문재인 후보의 공약 1호도 ‘적폐 청산’입니다.

'나라를 나라답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문재인 후보의 공약집  맨 윗자리는 '적폐 청산 특별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겠다는 약속이 올라 있습니다.

'적폐'로 몰린 인사나 세력들은 '내가 왜 적폐냐, 무엇을 청산하겠다는 것이냐'고 반발하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적폐(積弊). 말 그대로 '켜켜이 오래 쌓인 폐단'이라는 뜻입니다.

'적폐 청산'이 지금은 문재인 후보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사실 적폐를 없애겠다는, '적폐 청산'의 정치권 원 저작권자는 문 후보가 아닙니다.

바로, 현재 뇌물죄 피고인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온 국민을 경악과 비탄에 잠기게 했던 세월호 참사.

박 전 대통령은 당시 이 모든 게 지난 정권의 적폐가 쌓여 벌어진 일이라며 "그동안 쌓여온 모든 적폐를 다 도려내고 반드시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합니다.

같은 해 현충일 추념사에서도 박 전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비정상적인 적폐를 바로잡아 안전한 나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반드시 만들겠다" "뿌리 깊은 적폐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 안전은 물론 경제 부흥도 국민 행복도 이루기 어렵다"고 강조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이어 9일 뒤, 당시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를 청와대로 불러 놓고 경제 살리기와 비정상의 정상화, 국가 적폐 해소를 소리 높여 외칩니다.

국가 적폐 해소가 '개인적 명예'가 아니라 '역사를 위한 일'이라는 게 당시 박 전 대통령 발언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입으로는 적폐 해소를 부르짖으며 그 스스로는, 아마도 '적폐 해소' '비정상의 정상화' 라는 문구를 써줬을지도 모르는 최순실이라는 일개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이라는, 그 이전엔 듣도 보도 못한 적폐의 새로운 경지를 쌓아가고 있었음이 검찰과 특검 수사로 드러났습니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아니라 '비정상의 일상화', '국가 적폐 해소'가 아니라 '국가의 적폐화'.

적폐 해소를 외쳤지만, 결과적으로 스스로 청산되야 할 적폐가 돼버린 박 전 대통령에게도 대한민국에도 불우한 현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되고 청산되지 못한 적폐도 되풀이 됩니다. 그리고 청산하지 못한 적폐는 극적인 방식으로 발현됩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합니다.

고려 왕씨의 신하였던 정도전은 적폐 청산을 부르짖다 귀양을 갔고, 적폐 청산을 하지 못한 고려는 이성계와 손잡은 정도전에 의해 나라가 무너집니다.

이후 '진시폐소'(陳時弊疏), 쌓인 적폐를 해소하라는 상소는 조선 선비의 전통이 됩니다.

율곡 이이도 진시폐소를 올려 '조선이 건국되고 200년이 지나니 쌓인 폐단이 만만치 않다'며 세제와 벼슬제도, 군역의 경장을 호소하고 경연을 통해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을 주청했지만 선조는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쌓인 폐단을 청산하지 못한 선조와 조선은 율곡의 진시폐소 이후 십년 뒤, 임진왜란이라는 참화를 겪으며 나라가 결딴났습니다.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순조 때는 사헌부 지평 유의정이 지도층의 무절제한 사치와 뇌물, 군비의 허술함, 환곡의 폐단과 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지적하며 그 개혁을 주장하는 진시폐소를 피를 토하듯 올렸지만 순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흘려버립니다.

그리고 다 알다시피 적폐 청산을 하지 못한 조선은 국운이 기울며 국제 정세가 아무리 그렇다해도 너무도 허망하게 결국 망국의 길로 들어섭니다.

경술년의 국치, 이렇게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패망하자 재야에 야인으로 있던 매천 황현 같은 이는 자식과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자제서'(遺子弟書)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조선을 위해 지금 꼭 죽어야 할 의리가 내게는 없다.
그러나 조선이 선비를 기른 지 5백년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목숨을 끊는 이가 없다면
이 어찌 가슴 아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는 황천으로부터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은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고자
길이 잠들려 한다.
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

'글 아는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렵도다'라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매천 같은 선비들과 달리, 정작 세도정치와 매관매직으로 호의호식하며 국운을 기울게 만든 이들이 자결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들이, 그런 자들의 후손들이 일제에 부역하며 더 잘살고 잘먹었다는 그 반대의 얘기는 숱합니다

이는 그들이 청산돼야 할 적폐였다는 것과, 청산하지 못한 적폐로 인한 폐해와 고통은 적폐를 쌓은 자들이 아니라, 적폐 청산을 부르짖었던 의기있는 사람들이, 아무 죄없는 민초들이 겪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다시,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되고 청산되지 못한 적폐도 되풀이 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늘 그랬듯이, 청산의 대상인 적폐들은 늘 부정하고 저항합니다.

적폐 청산, 그 대상으로 지목된 세력들은 문재인 후보를 향해 '국민 대통합을 말하며 적폐 청산으로 나라를 내편과 네편으로 가르는 게 온당한가'라는 '지적질'을 합니다. 일부 언론도 이에 동조합니다.

논리학 용어 중에 '붉은 청어'(Red Herring) 오류라는 게 있습니다.

이른바 '논점 일탈의 오류', 본질을 벗어나 엉뚱한 데로 상대방의 관심을 돌려 논점을 흐리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청어는 원래 푸른색인데 이를 훈제하면 붉은색을 띤다고 합니다. 이렇게 훈제된 청어는 아주 독한 냄새가 나서 18~19세기 유럽에서  사냥개의 후각을 단련시키기 위해 이 훈제 청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관련해서 탈옥한 죄수나 도망자들이 추격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 훈제 청어를 사용해서 이런 비유가 나왔습니다.

적폐 청산을 말합니다. 말 그대로 쌓인 폐단 청산에 대해 얘기합니다.

이를 편가르기로 치환하고 국민 대통합 저해 문제로 논리를 비약합니다.

본질을 딴 데로 돌리는 수법, 전형적인 붉은 청어 수법입니다.

이런 논리적 오류를 따라가면 적페 청산 이슈는 결국엔 적폐 청산과 국민 대통합, 청산과 통합 사이 선택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그렇게 적폐들은 다시 살아남습니다.

지긋지긋하게도 목격한 일들입니다.

일제 이후 제대로 역사를 청산했다면, 제대로 적폐를 청산했다면, 당장, 쿠데타와 내란 수괴로 사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전두환(전 대통령) 같은 사람에게 '청산'의 의미를 제대로 보여줬다면, 어디 쿠데타와 내란 수괴 범죄자가, 그 부인이, 자기 아들이 급조한 출판사를 통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언필칭 '자서전'이니 '회고록'이니 이런 걸 써서 '나도 피해자'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전두환 회고록이 꽤 잘팔리는 모양입니다.

케이블 TV에선 예전에 MBC가 만들었던 '제5공화국'이라는 드라마도 심심치않게 이 채널 저 채널에서 다시 방송되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도 좀 나오는데 12·12 쿠데타와 5·18 광주항쟁을 진압하고 권력을 수중에 넣은 신군부는 이름이 좀 촌스럽긴 한데 'K 공작'이라는 프로젝트를 수행합니다.

여기서 K는 'KING'의 K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입니다.

공작의 대상은 언론이었습니다.

군인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보안사 일개 준위가 총책을 맡은 이 'K 프로젝트' 결과로 어떤 독재정권에서도 하지 못한 '언론사 통폐합'이란 게 시행됩니다.

 

1980년 이른바 '언론통폐합' 당시 신군부의 강압에 언론사주들이 경영하던 방송사나 신문사를 포기하겠다고 쓴 각서.

1980년 11월 12일, 그렇게 언론사 통폐합 조치가 발표되고 살아남은 언론들은 '결의문' 이라는 걸 발표합니다.

"정의가 지배하는 제5공화국의 출범을 예비하는 이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 언론은 남을 비판하기에 앞서 스스로를 바로잡겠다"며 '적폐' 청산을 얘기합니다.

당시 언론사들이 발표한 결의문 두번째 조항은 이렇습니다.

2. 우리나라는 구미 각국과 비교해도 많은 신문, 방송, 통신사가 난립하여 왔으며 이로 인하여 언론이 각계 국민에게 본의 아닌 누를 끼쳐왔고 사회적 적폐 또한 적지 않았음을 자성하며 근대적 공론기관으로서의 언론기업의 발전과 체질 강화를 기한다.

언론이든 정치권이든 스스로를 적폐로 규정하고도,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더욱 번창한 적폐들과 그 후손들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 지금까지도 적폐 청산 얘기만 나오면 학을 뗍니다.

적폐 청산이냐 국민 대통합이냐, 붉은 청어 오류를 교묘히 또는 대놓고 강요합니다.

'아폽토시스'라는 생물학 용어가 있습니다. '세포 자연사' 또는 '세포 자살' 정도로 번역하는데, 세포가 예정된 프로그램에 의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즉 '자살'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관련해서 '개미'를 쓴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아폽토시스를 인간의 진화 또는 생명의 순환과 연관지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 태아의 손이 엄마 뱃속에서 만들어질 때 초기 태아의 손은 물고기의 지느러미나 물개의 앞발과 다를 게 없다. 이렇게 지느러미처럼 생기게 만드는 세포들이 스스로 죽어야 태아의 손은 비로소 인간 손의 형태를 띠게 된다'

즉, 인간 손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지느러미 세포들의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고, 이렇게 지느러미 세포들이 스스로 죽어야 태아의 손은 '물고기'의 단계를 넘어서게 된다는 겁니다.

가을이면 나무들이 스스로 몸에 걸친 잎들을 다 땅에 내려놓는 것도 아폽토시스의 한 현상입니다. 가진 것들을 내려놓아야, 즉 죽어야 영원히 사는 겁니다.

 

죽어야 영원히 산다. 반드시 필요한 죽음 또는 자살.

이 아폽토시스를 거꾸로 보면 죽어야 할 것들이 죽지 않고 버티면 결국 전체의 죽음으로 이르게 됩니다. 암 세포가 대표적입니.

죽어야 할 세포들이 죽으라는 뇌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이기적 불멸성'을 추구하고, 결국 몸 전체를 죽게 합니다. 몸 전체를 죽일지언정 스스로는 결코 죽지 않습니다.

적폐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려내야 할 때 도려내지 못한 암은 전체를 죽게 만듭니다. 고려가 그렇게 망했고, 조선이 그렇게 임진왜란을 겪었고, 그렇게 망국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뿌리 깊은 적폐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 안전도 경제 부흥도 국민 행복도 이루기 어렵다"

"그동안 쌓인 모든 적폐를 다 도려내 반드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 이는 역사를 위한 일이다"

이는 문재인 후보 등 지금 대선 후보들의 공약이 아닙니다.

3년 전 세월호 참사 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입니다.

박 전 대통령은 그러면서 "국가 적폐 해소를 위해 무엇보다 여당의 도움이 절실하다. 여당이 앞장서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이에 당시 여당은 "박 대통령과 여당은 어떤 비바람 속에서도 한배를 탄 공동 운명체다. 어떻게 만든 정권인데 대통령을 잘못되게 할 수 있느냐. 대통령이 잘되게 모실 것" 이라고 화답했습니다.

'대통령이 잘되게' 모셨는지, '어떻게 대통령을 잘못되게 할 수 있느냐', 풍우동주(風雨同舟),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막상 박 전 대통령이 '잘못되자' 어떤 각자도생 행태를 보였는지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다만 몇 년 전엔 그토록 호기롭게 큰 목소리로 '적폐 해소'를 외쳤던 사람들, 세력들이, 역사까지 들먹이며 역사를 위해 하겠다던 그 적폐 해소에 지금은 왜 그렇게 거부감을 나타내며 저항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때 해소하려던 적폐와 지금 청산하려는 적폐가 다른 적폐인지, 그때의 적폐 해소는 편가르기도 하니고 국민 대통합도 해치지 않는 '비정상의 정상화'였는데 지금 적폐 청산은 아니라는 건지, 그렇다고 한다면 뭐가 왜 어떻게 달라졌다는 건지, 아니면 좀 더 솔직하게 그때는 적폐 청산의 칼자루를 쥐고 있었지만 지금은 적폐 청산 칼날 위에 목을 올려놓을 신세가 될 거 같아서인지.

속마음이야 알 수 없지만 박 전 대통령의 이 말은 꼭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뿌리 깊은 적폐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 안전도 경제 부흥도 국민 행복도 이루기 어렵다"

대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아폽토시스를 거부하는 존재들. '이기적 불멸성'을 추구하는 암세포같은 존재들. 암세포도 적폐도 전체를 죽일지언정 스스로 도려내지거나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박 전 대통령의 이 말을 다시 돌려 드립니다.

"그동안 쌓인 모든 적폐를 다 도려내 반드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겠다. 이는 역사를 위한 일이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제19대 대선, '그동안 쌓인 모든 적폐를 다 도려내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역사를 위한' 대선이 되길 바라봅니다. 적.폐.청.산.

유재광 기자 jaegoang-yu@lawtv.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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