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영 서울고법 부장판사 "재벌 폐해 시정, 실효적 준법감시제도 마련하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전 서울고법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첫 재판에 출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5일 오전 서울고법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첫 재판에 출석해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법률방송뉴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 총수로서 어떤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을 통감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세로 본 심리에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재용(51) 삼성전자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 첫 재판이 열린 25일 오전 서울고법 형사1부.

재판장 정준영 부장판사는 40여분 진행된 재판 말미에 이례적으로 이재용 피고인에게 이런 당부의 말을 시작했다.

정 부장판사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만 51세의 이건희 회장은 낡고 썩은 관행을 모두 버리고 사업을 질을 높이자는 이른바 '삼성 신경영'을 선언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며 이재용 부회장의 아버지 이건희(77) 삼성전자 회장을 언급했다.

그리고 정 부장판사는 "2019년 똑같이 만 51세가 된 삼성그룹 총수의 선언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라)"며 이 부회장에게 과제를 던졌다.

정 부장판사는 이어 "재판 진행이나 결과와는 무관함을 먼저 분명히 한다"고 전제한 뒤 "삼성그룹은 이런 범죄를 다시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며 이 부회장에게 3가지 당부사항을 전했다.

정 부장판사는 "그룹 내부에서 기업 총수도 무서워할 정도의 실효적인 준법감시제도가 작동되고 있었다면 이 사건 범죄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하급 직원뿐만 아니라 고위직과 기업 총수의 비리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효적 준법감시제도 마련과 재벌 폐해 시정을 위해 "미국의 연방양형기준 제8장과 미국 대기업들이 이미 실행 중인 준법감시제도를 참고해달라"고 주문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피고인석에서 차분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정 부장판사의 말을 경청했다.

이어 정 부장판사는 "국가경제발전을 주도한 재벌 체제는 이제 그 과도한 경제력 집중 현상과 일감 몰아주기, 단가 후려치기로 공정한 경쟁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정 부장판사는 그러면서 "우리 국가경제가 혁신형 경제모델로 도약하는 데 (재벌 체제가)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혁신 기업의 메카로 탈바꿈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최근 경험을 참고해 이 부회장이 문제점을 자체적으로 해결해달라"는 말로 당부를 맺었다.

◆ 627일 만에 법정 출석한 이재용 "심려 끼쳐 죄송합니다"

이재용 부회장이 이날 법정에 선 것은 지난해 2월 국정농단 사건 항소심 선고 이후 627일 만이다.

검은 양복에 회색 넥타이 차림으로 오전 9시29분쯤 법원에 도착한 이 부회장은 심경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굳은 표정으로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부회장은 "뇌물 인정 액수가 올라가 형량이 바뀔 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기이사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는데 재판에 따라 경영활동 계획이 바뀌느냐" 등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법정으로 들어갔다.

법정서 이 부회장은 재판부가 이름과 생년월일, 직업, 주거 등을 묻는 인정신문에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재용입니다" "삼성전자 부회장입니다"로 또박또박 답했다.

이 부회장은 재판이 끝난 후 심경과 함께 "향후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소명할 것인가", "오너 리스크가 커진다는 우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등 취재진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법원을 떠났다.

이 부회장의 변호인은 이날 재판 후 "대법원 판결을 존중한다"며 유무죄를 다투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변호인은 "(파기환송심에서) 주로 양형에 관해 변소할 생각이며, 사안 전체와 양형에 관련된 3명 정도의 증인을 신청할 계획"이라며 실형을 피하고 집행유예를 유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 뇌물액 50억 늘어 재수감 위기... 작량감경 집행유예 가능

이 부회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측에 뇌물을 준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됐다가 지난해 2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석방됐다.

당시 뇌물로 인정된 금액은 36억원이었다. 하지만 지난 8월 대법원은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과 최씨에게 공여한 정유라의 말 3필(34억 1천797만원 상당)과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낸 후원금(16억 2천800만원)을 모두 부정한 청탁에 따른 뇌물로 판단,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이 부분 뇌물액을 추가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이 판단한 총 뇌물액은 86억 8천81만원. 항소심의 36억 3천484만원보다 50억원가량 늘어난 액수다. 또한 말 3마리 값을 삼성전자 자금에서 충당했기 때문에 횡령액도 34억원가량 늘어났다.

이에 따라 이 부회장은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양형기준에 따르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액이 50억원을 넘으면 무기징역 또는 징역 5년 이상을 선고하게 돼 있다. 형량이 징역 3년을 초과하는 경우 집행유예 선고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집행유예 선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적용으로 선고할 수 있는 법정형 하한선인 징역 5년이 선고되고, 최대한 작량감경을 받을 경우 2년6개월까지 감형을 받을 수 있어 이 경우 집행유예 선고가 가능해진다.

법조계는 이 부회장이 지난 2017년 2월 구속된 후 항소심 판결까지 1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한 것도 작량감경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부회장은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이 선고됐다가,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돼 풀려났다.

이날 재판부는 향후 공판을 2차례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첫번째 기일 11월 22일에 유·무죄 판단에 대한 심리를 하고, 12월 6일 2번째 기일에 양형 판단을 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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