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한일 청구권 협정의 법적 쟁점

[법률방송뉴스] 어제(21일) 치러진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이 개헌 발의선 확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애초 목표로 제시한 과반 의석 확보엔 성공했습니다.

아베 총리는 “한국이 청구권 협정 위반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을 가져오지 않으면 건설적인 논의가 안 될 것”이라며 날을 세웠습니다.

청와대는 이에 “지금까지 제대로 된 답변하지 않았나. 최소한의 선을 지키라”고 즉각 받아쳤는데요. 일본의 수출 규제로 촉발된 한일 양국 갈등이 좀처럼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고 마주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치킨게임’ 양상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단초가 됐던 대법원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그 배경에 있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을 둘러싼 논란과 해석 차이 시시비비와 경과를 좀 자세하게 짚어보겠습니다. ‘앵커 브리핑’입니다.

지난 2012년 5월 24일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가 선고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와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문입니다.

“원고 등의 청구권이 한일 청구권 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 청구권 자체는 청구권 협정만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한 1·2심 판결을 깨고 원고 승소 취지로 판결했습니다.

일제 강제징용 전범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첫 판결입니다.

이 판결 2주 전인 같은 달 10일 대법원 2부는 같은 사안의 재판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하여 행사하지 못하는 청구권에 강제동원 등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도 포함된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한 바 있습니다.

같은 사안의 재판에 대해 대법원 2부와 1부가 2주 차이를 두고 180도 다른 정반대의 판결을 내린 겁니다.

결국 사건은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대법 전원합의체로 넘어가게 되는데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인정한 대법 전원합의체 판결 사유와 취지를 이해하려면 앞서 대법원 1부와 2부, 두 재판부 공히 언급한 ‘한일 청구권 협정’을 먼저 들여다봐야 합니다.

1965년 6월 22일, 박정희 정부는 한일국교 정상화 후속조치의 일환으로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합니다. 해당 조약은 4개의 협정과 25개의 문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일 청구권 협정’은 이 가운데 하나인 ‘경제 협력 협정’을 지칭합니다.

이른바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바탕으로 한 한일 청구권 협정 정식 명칭은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 및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입니다.

이 협정 제2조 1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양 체약국은 양 체약국 및 그 국민(법인을 포함함)의 재산, 권리 및 이익과 양 체약국 및 그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가 그것입니다.

같은 조 3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 ‘동일자’는 일본의 패전일, 우리나라엔 광복절인 1945년 8월 15일을 말합니다. 그 이전 식민지배 당시 벌어진 일에 대해선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내용입니다.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다’는 등의 협정 문구에 따라 일본 최고재판소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내에서 제기한 소송에 대해 지난 2003년 10월 원고 패소로 최종 판결했습니다.

이에 불복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다시 우리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10월 30일 대법 전원합의체 재상고심은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해 원고 승소로 최종 판결했습니다.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대법관 다수의견이었습니다.

관련해서 다수의견을 낸 김소영·이동원·노정희 대법관은 “청구권 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다“는 별개의견을 따로 냈습니다.

‘외교적 보호권 포기’, 즉 어찌됐든 한일 청구권 협정 체결로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설 수는 없지만 피해자 개인들이 일제의 불법 행위에 대한 구제에 나설 권리까지 포기된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판시입니다.

반면 권순일·조재연 두 대법관은 “한일 청구권 협정 제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이나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손해배상 청구권의 행사를 제한하는 것으로 봐야한다”는 반대의견을 냈습니다.

언뜻 보면 한일 청구권 협정 문구에 따라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대법 소수의견이 더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점을 이해하려면 다시 한일 청구권 협정의 모(母) 조약이라고 할 수 있는 ‘한일기본조약’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해당 조약 2조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 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돼 있습니다.

이 ‘이미’의 해석을 두고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크게 엇갈리고 있는 겁니다.

일본은 조약의 ‘이미’는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한 1945년 8월 15일 이후 조약 체결일인 1965년 6월 22일까지로, 일본의 조선 병합과 식민 지배 자체는 무효가 아니라는 즉 정당했다는 입장입니다.

이 전제 위에 일본 최고재판소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식민지배 당시 모든 청구권 문제가 해소됐고, 추가 청구권 행사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 겁니다.

반면 우리 대법원은 이 ‘이미’를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 자체가 무효로 일본의 식민지배가 불법 지배였던만큼 청구권 협정과는 별개로 불법 지배로 인한 피해에 대한 위자료 지급 책임이 있다고 판결한 겁니다.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는 강제동원 피해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대법관 다수의견이었습니다.

‘이미 무효’라는 글자를 일본 최고재판소는 식민지배가 끝나면서부터, 우리 대법원은 식민지배 시작부터 무효라고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가운데 자신의 페이스북에 ‘죽창가’ 링크 등을 걸었던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오늘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시 “한국의 일부 정치인과 언론이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비방·매도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일지 몰라도 무도하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무도(無道)하다. ‘말이나 행동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나서 막되다’는 뜻인데, 우리 대법 판결을 ICJ,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갔을 때 과연 어떤 판단이 내려질지는 더 꼼꼼히 따져봐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군이 이탈리아 군인 수십만 명을 독일 본토로 데려가 강제노역을 시킨 것과 관련해 과거 이탈리아 전쟁포로가 낸 소송에서 이탈리아 법원이 배상 판결을 내리자 독일이 사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가져가 뒤집은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페리니 사건’인데 국제사법재판소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1961년 체결한 2차 세계대전 기간 경제·민사관계 청산조약을 근거로 “나치 독일의 불법행위는 청산조약에 포함되지 않는 권력적 불법행위로 배상 책임이 있다“는 이탈리아 주장을 기각하고 독일 손을 들어줬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 불법성을 한일조약에 명시하지 않고 한일 청구권 협정을 덜컥 체결한 게 ‘원죄’라면 원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체결된 조약이니 만큼 현재의 대한민국이 안고 가야 할 대한민국의 일부입니다.

현재의 한일 갈등이 ‘제2의 임진왜란’, 100년 전 ‘제2의 3.1운동’에 까지 비유되고 있는데 냉철하고 치밀한 대응으로 이겼으면 합니다. '앵커 브리핑'이었습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법률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