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방송뉴스] 2017년 2월 법원행정처로부터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대회를 저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거부하며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단초를 제공한 이탄희 수원지법 안양지원 판사가 최근 법원에 사직서를 낸 것으로 확인됐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이 판사는 지난 1월 초 수원지법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11년간의 판사생활을 마무리하며 이 판사는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저에게는 회복과 재충전이 필요한 것 같다"며 사직 이유를 밝혔다.

"2년간 유예되었던 사직서라 생각한다"고 말한 것으로 비춰보면, 2017년 '사법행정권 남용'과 연관된 의혹을 세상에 알림과 동시에 사직서 제출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관련해서 이 판사는 "지난 시절 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 사회의 가치와 양심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며 "가치에 대한 배신은 거부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법관 사회의 가치와 양심을 지키지 못했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면서 "한 번 금이 간 것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다. 깨진 유리는 쥘수록 더 아프다"며 "하루라도 먼저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법원에 대해 이미 깨진 마음이 돌이킬 수 없음을 시사했다.

미래 법원에 대한 기대도 빼놓지 않았다. 이 판사는 "미래의 모든 판사들이 독립기관으로서의 실질을 찾아가길 기원한다"며 "항상 더 큰 공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다음은 이탄희 판사가 코트넷에 올린 글 전문이다.

 

[전문]

존경하는 모든 판사님들께

무엇보다, 오랜 기간 동안 전화와 메일 등으로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께 먼저 터놓고 상의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1월 초에 이미 사직서를 제출하고도 말씀을 드릴 수 없어 마음 앓았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 처지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번 정기인사 때 내려놓자고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저에게는 회복과 재충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2년이 길었습니다. 작년 이맘 때 쯤 다시 마음을 다잡아봤지만, 다시 1년을 겪었습니다. 2년간 유예되었던 사직서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미련도 두려움도 줄어서 좋습니다. 

처음부터 정의로운 판사를 꿈꿨던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저만의 지기 싫은 마음으로 판사가 된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된 이상은 가장 좋은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랬듯이 단 하나의 내 직업, 그에 걸맞은 소명의식을 가진 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상이 있는 판사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의 좋은 모습만 닮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럴수록 선배들도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영감을 주는 선배가 되고 싶었습니다. 소속감을 주는 건전한 법관사회가 제 주위엔 분명히 있었습니다. 

지난 시절 행정처를 중심으로 벌어진 헌법에 반하는 행위들은 건전한 법관사회의 가치와 양식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법관이 추종해야 할 것은 사적인 관계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공적인 가치입니다. 가치에 대한 충심이 공직자로서의 명예라고 생각합니다. 가치에 대한 배신은 거부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번 물러서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좋은 선택을 한 뒤에는 다시 그 선택을 지켜내는 길고 고단한 과정이 뒤따른다는 것을, 진실을 밝히는 과정이 끝없는 노력과 희생을 요한다는 것을, 그때는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한때는 ‘법원 자체조사가 좀 제대로 되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단 하루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시작만 혼자였을 뿐 많은 판사님들 덕분에, 그리고 나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모든 분들이 자기의 뜻을 세워 하신 일입니다. 하지만 또 제 입장에서는 덕분에 외롭지 않았습니다. 드러난 결과는 씁쓸하지만, 과정을 만든 한분 한분은 모두 존경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판사가 누리는 권위는 독립기관으로서의 권위라고 생각합니다. 조직원으로 전락한 판사를 세상은 존경해주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성운처럼 흩어진 채로 모여 있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모든 판사들이 독립기관으로서의 실질을 찾아가길 기원합니다. 제 경험으론, 외형과 실질이 다르면 단단해지지 않습니다.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더 큰 공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의 미래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2년간 배운 것이 많습니다. 한번 금이 간 것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결국 인생은 버린 사람이 항상 이긴다는 것을 저는 배웠습니다. 깨진 유리는 쥘수록 더 아픕니다. 하루라도 먼저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무엇을 하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겠습니다. 저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부터 먼저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주신 너무나 많은 분들, 그 한분 한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최소한 밖에 하지 못하고 일어나게 되어 죄송합니다.

다시 뵐 때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 판사 이탄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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