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이재용, 그리고 우병우... 역사의 법정에는 시효가 없다

시정(政)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밝히고, 문무백관(文武百官)의 비위와 불법을 규찰하고,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들이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고, 나아가 왕이 정한 인사나 법률이라도 법도에 어긋나면 단호히 거부하는 것.

고려와 조선, 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며 '법'을 수호하는 막중한 업무를 맡은 조직이 있었다.  바로 '사헌부(司憲府)'다.

사(司)라는 글자에 '맡다' '지키다' '수호하다'는 뜻이 있고, 헌(憲)은 법을 뜻하니 사헌부는 글자그대로 '법을 수호하는 관청'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사헌부의 수장은 큰 대(大) 자를 써서 대사헌(大司憲)이라 불렀다.

형조가 범죄행위를 수사해 처벌하는 지금의 검찰이라면, 의금부는 지금으로 치면 설립을 두고 논란 중인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공수처 정도에 해당한다. 주로 일반 백성들의 범죄를 다루는 포도청은 경찰청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굳이 사헌부를 지금의 직제나 직무에 비교한다면 청와대 민정수석실, 대사헌은 민정수석이 될 것이다.

상상이, 가늠이 되는가. 민정수석이 대사헌이라니. 그 '우병우'가 그 '대사헌'이라니. 그러나 사실이 그렇다.

대사헌의 품계는 종2품, 지금의 차관 직위에 해당하고 민정수석의 직급도 차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사헌이 짊어진 직무가 지금의 민정수석이 담당하는 업무와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사헌부와 관련된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연합뉴스
세계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사헌부와 관련된 일화가 여럿 전해진다./ 연합뉴스

 

허망한 일이지만 옛날 얘기를 해보자.

사헌부는 고위 관리는 물론 임금의 친인척이라도 비리가 드러나면 판자에 그 죄목을 써서 가시더미와 함께 그 집 대문 앞에 걸었다.

나아가 대소 신하가 아닌 임금 자신까지도 잘못이 있으면 거침없이 '탄핵(彈劾·잘못을 들어 꾸짖음)'했기에 그 엄정함이 서릿발 같다 해서 서리 상(霜) 자를 써서 '상대(霜臺)'라 불렀다.

또 서릿발 같은 엄함이 한결같다 해서 가을 관청, '추관(秋官)'이라고도 불렸다.

정조 때 이긍익이 기술한 역사책인 '연려실기술'엔 "사헌부 관헌이 정색하고 조정에 서면 모든 관료가 떨고 두려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려실기술은 또 "사헌부는 심히 맑아서 물욕이 없다"며, '사헌부의 칼'인 정6품 '감찰(監察)'에 대해선 "남루한 옷에 좋지 않은 말과 찢어진 안장, 짧은 사모에 닳아 해진 띠를 걸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엄정함과 청렴함. 이렇듯 사헌부와 사헌부 관헌들은 엄정함과 청렴함의 화신 그 자체로 평가 받았다.

이를 위해 사헌부 관헌들은 조정 회의에 참석할 때 가장 먼저 들어가 가장 늦게 나갔다. 친구가 상을 당해도 사람들이 있는 때를 피해 홀로 조문하고 홀로 돌아왔다.

오며가며 부딪치는 그 짧은 사이라도 청탁 받을 가능성과 말이 나올 가능성을 아예 사전에 차단하려는 몸가짐과 처신이었다.     

조직의 수장인 대사헌을 마주할 때는 대사헌이 앉은 뒤 '도리(都吏)'라는 직책의 관헌이 "모두 앉으시오"를 네 번 외친 다음에야 앉았을 정도로 사헌부 내 위계는 엄격했다.

그럼에도 임금이 임명한 대사헌이라도 흠결이 있는 자라면, 부임하는 대사헌을 모든 관헌들이 서서 도열하는 법도와 예를 버리고 자리에 앉은 채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일단 임명된 대사헌이라도 해야 할 탄핵을 안하고 소임을 회피하거나 게을리하면 사헌부 아래 관헌들이 스스로 나서 조직의 수장인 대사헌을 탄핵했다.

대사헌은 대사헌대로, 탄핵 당한 왕족을 위해 왕이 대사헌을 불러 "좀 봐달라"고 은밀히 요청해도, "그렇게 하면 관헌들이 소신을 탄핵할 것입니다" 하고 거절했다.

이렇듯 사헌부는 수장 대사헌부터 아래로는 정6품 하위 관헌까지 그 기개와 당당함, 엄정함이 가을 서리, 추상(秋霜) 같았다.

그래서 세종 조 대사헌을 지낸 양촌 권근은 '상대별곡(霜臺別曲)' 1장에서 사헌부를 이렇게 노래했다.

 

화산(華山) 남쪽 한강 북쪽은 예부터 이름난 운치 좋은 땅

광통교(廣通橋) 운종가(雲從街) 건너 들어가면

죽죽 늘어진 늙은 소나무 우뚝 솟은 잣나무 사헌부(秋霜烏府·추상오부) 있네 

아, 만고의 청아한 바람 어떠한가

영웅호걸 당대의 인재 그 얼마이던가

 

모두 5악장으로 돼 있는 상대별곡 마지막 장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나라 멱라에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구나' 읇조린 굴원이 그대는 좋은가

절의 지켜 녹문산 들어가 나오지 않은 맹호연이 그대는 좋은가

어진 임금과 좋은 신하 서로 만나서 맑은 강물 같은 태평성대에

청총마같은 인재들 운집해 있음이 나는 좋더라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아우르는 당대의 문신이었던 권근이 저리 노래할 정도로 사헌부는, 대사헌은 긍지이자 자부의 결정체였다.

대사헌은 그런 자리다.

 

영통사 경루에 걸려 있는 권근의 시문 편액. 고려말 조선초 문신인 권근은 5악장으로 이뤄진 '상대별곡'에서 사헌부의 기개, 자부심을 노래했다. 상대(霜臺), 서리 상(霜) 자를 쓴 상대는 사헌부의 별칭이다.

서거정. 대사헌을 지낸 권근의 외손자다. 세종 때 출사해 조정에 나가 45년 간 관직에 있으면서 성종까지 여섯 임금을 섬기며 육조의 판서와 경기관찰사, 대제학 등을 두루 지냈다.

무엇보다 외할아버지 권근의 문장을 계승해 조선의 대법전인 경국대전과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의 편찬을 주도하며 서문(序文)을 작성한 당대의 문장가다.

나이라고 할 것도 없는 여덟 살 봄에 '일곱 걸음을 떼기 전에 시를 짓는다'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시인 조식의 '칠보시(七步詩)' 고사를 빗대, "그것은 조금 느린 것 같아요. 저는 다섯 걸음 안에 시를 지어보겠습니다" 하고 외할어버지 권근 앞에서 실제로 시를 지어 보인,

모르긴 몰라도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으로 '소년 급제' 반열에 오른 우병우 전 민정수석보다 더하면 더했지, 처지는 천재는 아니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조선시대 인물비평서인 '국조인물고'에 서거정을 두고, 

"선비 중에 덕(德)과 공(功), 말(言), 즉 삼불후(三不朽)를 겸비한 자가 드물지만, 서거정은 말은 학문의 모범이 되고 공은 관직의 직무를 지켰으며 덕은 인망에 부응하니 무엇을 더할 것이 있겠는가"라는 평가가 전해질 정도다.

외조부 권근을 따라 서거정도 나이 마흔넷에 한 번, 쉰셋에 또 한 번 두 차례 대사헌을 지냈다.

처음 대사헌에 임명되면서 서거정은 '신배대사헌(新拜憲)'이라는 시를 지어 부임하는 감회와 자세를 이렇게 밝혔다.

 

(오부청반동백관) 사헌부 맑은 부서는 백관을 움직이는 자리인데
(부재승핍괴조단) 재주 없고 모자란 내가 대사헌 자리를 받았으니 부끄럽구나
(하인자유풍상면) 어떤 이는 서릿발 같은 위엄이 있었다는데
(금아원비철석간) 지금 나는 본디 철석같은 마음도 갖추지 못했구나
(직검불사종백절) 곧은 칼날은 끝내 백 번 부러짐을 사양치 않는데
(곡등하용요천반) 굽은 넝쿨은 천 번이나 휘감기니 어디에 쓰겠는가
(행봉소대무봉사) 다행히 밝은 시절 만나 소임 행사할 일 없으니
(명봉조양상역난) 조정에 봉황 울음(탄핵 상소) 소리 나기 어렵겠구나

 

서거정. 이름 '거정(居正)' 은 '춘추' 공양전(公羊傳)에 나오는, '군자는 바른 곳에 거처한다'는 뜻의 ‘군자대거정(君子大居正)'에서 따온 이름으로, 정도를 지킨다는 뜻이다.

서거정의 자는 강중(剛中), '강중'은 '주역(周易)'의 괘(掛)에서 양(陽)이 가운데 있는 것을 이르는 말로, 가운데 양이 있는 것이 바로 '바른 자리'다. 

서거정이 누구인가. 23번이나 과거 시험을 주관해 훈구파(勳舊派)의 기틀을 놓음으로써 정치적 평가는 갈리지만, 형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성균관 지사를 겸해 '문형(文衡)'을 관장했으며,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는 평가를 받았던 당대 제일의 문사다.

그런 서거정조차 대사헌에 부임되며 '재주없고 모자란다'고 스스로를 낮추었다.

옛사람의 서릿발 같은 위엄을 각인하며 백 번 부러질지언정 굽은 넝쿨은 되지 않겠다는 자세와 각오로 자리를 받았다.  

사헌부는, 대사헌은 그런 자리다.

 

서거정 초상. 세종에서 성종까지 무려 6명의 임금을 섬긴 문신 학자 서거정은 육조의 판서와 대제학 등을 두루 역임했고, 40대에 한 번 50대에 다시 한 번 두 차례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서거정이 훈구파(勳舊派)의 기틀을 놓았다면, 사림(士林)의 정신적 뿌리가 된 이가 있다. 정암 조광조. '유교적 이상 정치'를 꿈꾸었던 조광조는 나이 서른여섯에 대사헌이 됐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한 공신 세력은 조정과 국사를 좌지우지했다. 왕권을 회복하고 싶었던 중종과, 중종을 통해 성리학에 기반한 도학 정치를 구현하고 싶었던 조광조의 만남은 어쩌면 시대의 필연이었다.

그릇됐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을 탄핵해야 할 대사헌 자리가 일신에 어떤 위험을 불러올지 잘 알고 있었지만 조광조는 대사헌 자리를 받은 이상 소임을 회피하거나 물러서지 않았다.

1519년 10월 조광조는 반정 공신들을 정면으로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

"정국 공신 중에는 연산군의 신임을 받았던 자들이 많사옵니다. 이들은 연산군이 선정을 이룰 수 있도록 간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큰 죄를 범했사옵니다."

공신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고 사림의 세력이 너무 커진 것을 저어한 중종은 조광조를 유배 보내고 이윽고는 사약을 내려 죽인다. 그를 따랐던 사림들도 떼죽음하거나 귀양을 면치 못했으니,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유교적 이상 사회를 꿈꾸었지만 뜻을 다 펼쳐보지도 못하고 30대에 요절한 조광조를 율곡 이이는 '동호문답'을 통해 이렇게 비판하면서도 아까워했다.

"오직 한 가지 애석한 것은 조광조가 출세한 것이 너무 일러서 경세치용의 학문이 아직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의논하는 것이 너무 날카롭고 일하는 것도 점진적이지 않았으며, 간사한 무리가 이를 갈며 기회를 만들어 틈을 엿보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신무문이 밤중에 열려 어진 사람들이 모두 한 그물에 걸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선비들의 기운이 몹시 상하고 나라의 맥이 끊어지게 되어 뜻있는 사람들의 한탄이 더욱 심해졌다."

이토록 조광조의 이른 죽음을 아쉬워한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대사헌 조광조에 대한 세간의 평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조광조가 대사헌이 되어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니 사람들이 모두 감복해서 그가 밖으로 나가면 시장 사람들이 말 앞에 모여들어 '우리 상전(주인) 오셨다'고 말하더라."

그토록 중종의 총애를 받았음에도 조광조가 바라보는 곳이 어디였는지, 조광조가 누구를 위해 대사헌의 직분과 권한을 썼는지, 조광조가 왜 끝내는 중종에게서 버림을 받았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믿었던 중종에게서 사약을 받고 조광조는 운도 맞추지 못한 20자 절명시(絶命詩)를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다.

 

父(애군여애부)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했노라  

家(우국여우가) 나라 근심하기를 내집 근심하듯 했노라 

土(백일임하토) 밝은 해가 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衷(소소조단충) 환히 환히 내 붉은 마음 비추어 주리라

 

조광조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다. 다만 그 마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가짐으로 받은 자리.

대사헌은 그런 자리다. 

 

1750년 경에 정홍례가 그린 조광조 초상. 조광조는 사림의 사상적 중시조이면서 유교적 이상주의 국가를 꿈꾸었던 혁명가이기도 하다. 사헌부 대사헌에 부임해 공신들의 적폐 청산을 부르짖다 귀양 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여기 세 사람이 있다.

대통령을 등에 업고 기업들에서 수백억원을 뜯어낸 자.

대통령을 등에 업은 자를 이용해 수백억원을 들이고서라도 '가려운 곳'을 긁으려 했던 자.

그걸 막아야 할 자리에서 손에 쥔 알량한 권력으로 이런 부당한 뒷거래의 걸림돌을 정리하며 부당거래를 묵인하고 방조한 자.

'최순실, 이재용, 우병우'가 받고 있는 혐의들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라는 영화 제목에 빗대 '나쁜 놈, 더 나쁜 놈, 제일 나쁜 놈' 식으로 굳이 구분한다면 누가 가장 '나쁜 놈'인가.

최순실씨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국정을 농단하고 부정한 돈을 주고 받은 혐의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있다. 지난 달 25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이 부회장은 뇌물 혐의 등이 인정돼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반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범죄 소명이 미흡하다'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친 검찰 영장이 모두기각돼 '법꾸라지'라는 민망하고 달갑지 않은 별명을 얻었다.

영장 발부야 법원의 판단이고, 이유와 배경이야 어떻든 검찰과 특검 수사가 미흡했을 수도 있으니 현 단계에서 '법적 판단'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런 아쉬움이 남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정윤회 파문'이 처음 터졌을 때 민정수석실에서 제 역할을 했다면, 최순실씨의 비리를 조사하던 특별감찰관실의 수사가 무력화되지 않았다면, 그래도 이처럼 황당하기까지 한 국정 농단 사태가 계속될 수 있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 우병우 전 수석은 어떤 역할을 했는가.

정윤회 파문의 프레임을 '비선의 국정 개입'이 아닌 '청와대 문건 유출'로 비틀어 애꿏은 경찰 몇 명과 정윤회 파문을 보도한 신문사만 쥐잡듯이 잡았다.

최순실 비리를 조사하던 이석수 특별감찰관에 전화를 걸어 "형, 어디 아파?" 하며 이 감찰관을 잘라냈고 특별감찰관실을 무력화시켰다.

청와대 입맞에 맞지 않는 공무원들은 본보기로 잘라내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조를 심어 줬다.

검찰 인사 등을 좌지우지했다는 박근혜 정부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는 우병우 전 수석이 받고 있는 혐의들이다.

물론 우 전 수석 본인은 민정수석으로서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했다거나 '대통령의 뜻'을 받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 번을 양보해 민정수석으로서 대통령의 뜻을 받든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했다 해도 그 결과가 무엇인가. 사상 초유의 민간인에 의한 국정 농단이다. 민정수석은 그런 국정 농단을 막아 규율을 세우라는 자리다.

그래서 다시 사헌부로 돌아가면, 사헌부 관헌들은 '어명도 법 아래에 있다'는 기조 아래 임금에 대한 직언과 탄핵을 멈추지 않았다.

서슬퍼런 연산군 시절에도 사헌부는 "전하는 학문도 높이지 않고 정사에도 게으르고 간쟁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직언을 거침없이 올렸다.

전국에 채홍사를 보내 기생들을 도성으로 들여 이들을 위해 인가를 헐고 백성들을 쫒아내고 흥청망청하자 "토지와 인민이 모두 임금의 소유냐"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상소를 올렸다.

연산군의 애첩 장녹수가 연고 없이 이웃집을 빼앗자 사헌부는 어김없이 "불가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화가 날 대로 난 연산군이 대사헌과 장령 등 사헌부 수뇌들을 모두 의금부에 하옥시켜 국문케 했지만 사헌부는 상소와 간쟁을 멈추지 않았다. 

세종 때엔 세종의 형 양녕이 '도성 출입을 금하라'는 태종의 유명을 어기고 도성에 출입해 관기와 사통하자 김종서는 사헌부 집의 신분으로 '양녕을 탄핵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양녕의 행동은 양녕이 도성에 있으면 세종의 왕위에 위해가 될까 우려한 태종의 유지를 정면으로 어긴, 왕의 안위와 관련된 중차대한 잘못으로, 사헌부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양녕과의 형제의 우애로 "다시 말하지 말라" 했지만, 김종서는 굴하지 않고 "이 사건을 자신의 뜻대로 처리해 주지 않으면 전하와 영원히 이별입니다" 하며 '양녕을 국문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다.

사헌부는 이런 식으로 무려 15차례나 이 문제를 간쟁했고, 결국 대사헌 김맹성과 집의 김종서는 의금부에 투옥됐고 김종서는 장 80대를 맞는 수모까지 당했다.

'성군'인 세종에도 '폭군'인 연산군에도 사헌부는 직언과 간쟁, 탄핵에 거침이 없었고, 이런 사례는 손가락에 다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게 사헌부고, 사헌부 관헌이었고, 대사헌이었다. 바로 지금의 민정수석이다.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해 직권남용 등 혐의로 청구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지난 2월 22일 오전 우 전 수석이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걸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해 직권남용 등 혐의로 청구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에 대한 구속영장이 법원에서 기각되면서 지난 2월 22일 오전 우 전 수석이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걸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정부 시절 민간인과 공무원 사찰 등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국정원 공식 보고 체계를 벗어나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게 비선 직보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추명호 전 국정원 국익전략국장이 27일 검찰에 소환됐다.

국정원 국익전략국장까지 수족처럼 부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우병우 전 민정수석.

약관 스무살에 사시에 소년 급제해 대검 중수1과장과 수사기획관을 지낼 정도로 '특수통' 검사로 잘 나갔고, '우병우 사단' 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권세도 누려 봤고, 거기다 수백억 넘는 돈도 있고 제사 지방에 쓸 만한 벼슬도 지냈고 법률 지식도 있으니 어쨌든 우병우 전 수석은 한평생 '잘' 살다 갈 것이다.

다만, 유방백세(流芳百世) 유취만년(遺臭萬年), 향기로운 이름은 백년을 가지만 썩은 냄새는 만년을 간다 했다.

'박근혜 대통령 비선실세 최순실 국정 농단'. 역사에 새겨져 기록될 것이다.

우 전 수석이 그 일부로 향기로운 이름을 남길지 만년 가는 악취를 남길지는 세상 사람들이, 무엇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 것이다.

천라지망(天羅地網).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하나 넓고도 넓어 빠져나갈 수 없다 했다.

그러니 정명(正名). 바른 이름. 

공자는 여덟 글자로 정명을 이렇게 말했다.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했다.

우 전 수석은 신하다웠는가. 민정수석다웠는가. 조광조나 김종서까진 바라지 않아도 손톱만치라도 '대사헌' 다웠는가.

그러니 우 전 수석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되든 말든, '법꾸라지'라는 법률 지식을 십분 활용해 무죄를 받든 말든, '사실'대로 사실을 역사에 새겨 그 이름을 백년 만년 후세에 전하면 될 일이다.

누가 그랬잖는가. 역사의 법정에 시효는 없다고.

 

섬겼던 임금 중종에게서 사약을 받고 "임금은 강녕하신가" 묻고, '밝은 해가 이 땅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환히 환히 내 붉은 마음 비추어 주리라'는 소회를 남긴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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