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와 길라임, 최순실... 그 많은 이름 중에 왜 '길라임'이었을까

미르. 용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러시아 말로는 평화를 의미한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평화가 바로 미르다. 러시아가 쏘아올린 국제우주정거장 '미르 호'의 미르도 그 미르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기 전에는 이스라엘 집단농장 '키부츠'처럼 일종의 촌락공동체도 미르라고 불렀다. 철자는 조금 다르지만 '세상' 또는 '세계' 라는 뜻의 러시아어 발음 엮시 미르인 데서 연유한 것이다.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던 '미르' 라는 이름이 인구에 회자된지 꽤 됐다. '국정농단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만든 '미르 재단' 때문이다.

재단법인 미르의 로고도 용 모양을 형상화했다.

관련해서 '비선 진료' 의혹을 받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민간 병원에 예약을 하며 '길라임'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것으로 드러나 입길에 올랐다.

길라임은 배우 하지원씨가 주연으로 나온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여주인공 이름이다.

공교롭게도 극중 길라임의 어깨에도 '용' 문신이 새겨져 있다. 모양도 미르재단 로고와 비슷하다.

이때문에 일각에선 박 대통령이 길라임이라는 가명을 쓴 게 우연이 아니라는 웃지 못할 얘기까지 나왔다. 

미르, 용 문신, 길라임. 이게 다 한 맥락이고, 배후엔 '최순실'이 있다는 주장이다.

 
트위터 캡처
트위터 캡처

그런데 미르재단 로고를 보면 꼭 닮은 문양 하나가 떠오른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많이 나오는 '삼족오'다.

삼족오는 고대 신화에서 태양에 살고 있다는 발 세 개 달린 까마귀로, 이름 자체가 '발 세 개 달린 까마귀'다.

미르재단 로고를 보면 다리 세 개만 없다 뿐이지, 문양의 구도나 특징, 흐름이나 상징이 삼족오와 거의 흡사하다.

 

중국 지안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삼족오.
삼족오 해뚫음 무늬 금동 문양.

삼족오는 태양에 살고 있기도 하지만 태양 그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 삼족오가 잡아 먹고 사는 것은? 바로 용이다.

황허에서 발원한 용의 후손임을 자처했던 중국으로선 뒤통수에서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 고구려라는 존재가 마뜩찮았을 것이다.

거기다 이제 막 중국을 통일한 거칠 것 없던 수나라 30만 대군이 쳐들어 갔다가 살수에서 몰살 당하고 겨우 2천700명만 살아 돌아간,

중국 역사상 가장 강대했다던 당, 그중에서도 '정관의 치'로 유명한 당 태종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친정에 나섰지만 양만춘이 지키고 선 조그만 안시성 하나를 깨지 못하고 "앞으로 고구려는 건들지 말아라"는 유언 비슷한 걸 남겼다는 중국으로선,

용을 잡아먹고 산다는 삼족오는 반드시 손봐야 할, 지워버려야 할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고구려 멸망 이후 삼족오는 우리의 역사에서 지워져 갔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반쪽짜리 용과 봉황이 대신했다.

조선은 발톱 다섯 개 '오조룡'을 황제의 문양이라 해서 황제의 문양과 같은 문양을 쓸 수 없다며 발톱 네 개짜리 '사조룡'을 왕의 곤룡포에 새겼다.

불구의 용이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훼손된 경복궁 근정전을 대원군이 중건하면서 발톱 7개짜리 칠조령을 천장에 그렸지만, 이후 종묘와 사직이 끊어진 조선의 역사를 생각하면 허망할 뿐이다.

 

경복궁 근정전 칠조룡.

우리 역사에서 삼족오가 사라져 가는 동안 삼족오의 상징과 의미를 가로채 간 나라가 있다. 일본이다.

삼족오가 상징하는 태양. 그 태양을 천황에 투영해 1대 천황을 태양의 존재로 추켜올리고, 그 핏줄을 따라 이어지는 태양의 후예로서 '만세일계'의 정통성을 수립한 것이다.

그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삼족오는 지금도 일본 국민들의 가슴에 살아있다. 말 그대로 '가슴'에 새겨져 있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유니폼이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 유니폼. 가슴에 삼족오가 선명하다.

 

가슴 아프지만 '태양의 후예'는 송중기도 송혜교도 아니었다. '일본'이었다.

그래서 유불선 삼도에 통달했다는 아버지 최태민 목사의 진전(眞詮)을 이어받았다는, '우주의 기운'까지 논하는 최순실씨가 미르재단 로고로 삼족오를 차용해 온 것을 봤을 때 반가우면서도 뜨악한 느낌이 들었다.

반가움은 용을 뜻하는 우리 고운 말과 삼족오라는 잊혀진 상징을 하나로 가져온 것, 뜨악함은 말할 것도 없이 최순실씨가 미르재단을 통해 벌인 행태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최순실씨와 미르와 연관된 또다른 이름이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블라디미르'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이다.

삼성이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에게 사줬다는, 무려 30억원이 넘는다는 '명마'의 이름이 바로 '블라디미르'다.

'미르'는 러시아어로 세상, 세계를 뜻하고, '블라디'는 갖다, 소유하다는 뜻이다. 조합하면 '세상을 갖다', '세상의 지배자'라는 정도의 뜻이 된다.

어떤 '명마'이기에 30억원씩이나 나가고 '세상의 지배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별천지의 세상이니 궁금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사실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을 가진, 익히 아는 아주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 둘 있다. '블라디미르 레닌' 과 '블라디미르 푸틴' 이다.

레닌은 꼭 백년 전에 볼셰비키 혁명으로 현실 정치와 국가 형태에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인류사 최초로 구현한 인물이고, 푸틴은 그 소비에트가 이어진 러시아를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걸쳐 철통 지배하고 있으니, 

레닌과 푸틴 모두 '세상을 다 가진 자'라는 의미의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이 조금도 과하지 않다.

다른 의미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세상을 다 가진 자'일 것이다.

삼성이라는 글로벌 경제제국의 지배자인 그 이재용 부회장이 '세상의 지배자'라는 이름을 가진 명마 블라디미르에 발목을 잡혀 구치소에 갈 위기에 처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뇌물공여 혐의를 받고 있는 이 부회장에 대해, 삼성이 정유라씨에게 사 준 30억원짜리 말 블라디미르도 '뇌물'로 적시해 구속영장을 재청구했다.

삼성은 물론, 이재용 부회장은 지은 죄가 없다는 입장이다. 감옥 갈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에 따르면 세상에 일어나야 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우연처럼 보이는 것들도 결국엔 필연으로 가는 과정이다. 레닌에겐 그 '필연'이 (결국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의 도래였지만, 세상사도 결국엔 얼추 그 비슷한 거 같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거꾸로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로 인한 결과가 있다. 그래서 사필귀정(事必歸正).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곳, 가야 할 곳으로 간다. 그때가 언제냐가 문제일 뿐이다.

최순실과 미르, 블라디미르, 이재용. 돈과 이권을 고리로 한 묘한 우연과 인연이라면 인연으로 이어진 이 이름들이 어떤 필연으로 끝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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