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잠'... 표현의 자유와 여성 비하 논란 사이

표창원 의원이 박근혜 풍자 누드 그림으로 곤욕을 치루고 있다. 본인이 기획한 국회 전시회에서 관련 그림이 전시되면서 새누리당은 물론 친정인 더불어민주당에서도 '노무현 누드화를 그렸다면 우리는 가만 있겠냐'는 식의 질책이 이어지고 있고, 여성 단체들은 '여성의 몸을 대상화, 관음화, 풍자가 아닌 여성혐오'라는 등의 성토와 비난을 일제히 쏟아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누드 풍자화 '더러운 잠'/ 이구영 작품

이번 논란을 보면서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와 권리는 어디까지 허용되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표현의 자유고 어디서부터는 일탈 혹은 범죄로 봐야 하는지 등에 대한 오래됐지만 여전히 되새겨볼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이 떠올랐다

'First Amendment' 라고 불리는미국 수정헌법 1조는 종교와 언론, 출판, 집회 및 청원의 자유. 즉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고 있다.

'합중국 의회는 특정 종교를 옹호하거나 자유로운 종교 행위를 금지하거나, 언론 또는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또는 조용히 집회하고 피해를 구제받기 위하여 정부에 청원하는 인민의 권리를 침해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가 그것이다.

미국은 영국이라는 당대 최강의 식민 종주국으로부터 독립전쟁을 통해 피를 뿌리고 그 피 위에 세워진 나라다. 그렇게 세운 나라는 피를 따라 이어지는 왕이 아닌 인민이 선출한 대통령이라는 선출된 권력이 인민을 대리해 국가를 통치하는 세계최초의 현대식 민주주의 국가다.

그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헌법(당시엔 권리장전) 제1조에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이유는 자명하다. 표현의 자유가 곧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뼈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미국 연방 대법원의 역사는 이 표현의 자유를 수립해온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 미국 연방 대법원 홈페이지는 이 표현의 자유의 범위와 한계에 대해 판례들을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미국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집회에서 성조기를 태우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반면, 징병 통지서를 태우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다.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

성조기를 태우는 것은 상징적 의미의 표현일뿐 누구에게도 어떤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다. 반면 징병 통지서를 태우는 것은 군에 가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으로 이는 효율적인 국가 징병제도시스템에 심각한 타격을 미칠 수 있다. 즉 실질적인 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표현의 자유의 규제나 침해에 대한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의 원칙rule of clear and present danger)' 이다.

국가나 사회, 시민들에게 해나 위험이 발행할 것이 명백하고도 지금 당장 발생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경우에도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미국 연방헌법 제1조가 규정하고 최고 사법기관인 연방 대법원이 판결로 확립한 원칙이다.

백인우월주의자들로 구성된 흑인들에 대한 숱한 테러로 악명높은 KKK단의 집회도 폭력사태를 일으키지 않는한 막거나 제한할 수 없지만, 극장에서 '불이야' 하고 외치는건 내입 갖고 내맘대로 외치는 것이지만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어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이 그 단적인 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더러운 잠' 이라는 제목의 박근혜 대통령 풍자 누드화는 이른바 '인상주의'의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스 화가 마네가 1865년 파리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 를 패러디 하고 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캔버스에 유채 / 130.5×190㎝ / 1863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올랭피아'는 당시 파리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같은 '창녀'의 대명사같은 이름이다.

침대 모서리 올랭피아의 발끝에 검은 고양이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특정 '해산물'이 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것처럼 프랑스어로 암고양이를 일컫는 단어 la chatte도 은어처럼 여성의 음부를 뜻하기도 한다.

창녀와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는 고양이. 머리엔 꽃을 꽂고 목줄을 한 알몸으로 수치심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시선으로 피곤한듯 귀찮은듯 무심한듯 정면을 응시하는 도발적 그림.

마네의 올랭피아는 당대 프랑스 파리 상류층의 위선과 가면 속 얼굴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는 '풍자화의 원조' 같은 그림이다. 올랭피아의 시선과 몸을 빌려 '당신들이 날 뭐라 할 자격이 있어? 나를 거쳐간 게 누군데, 이런 나를 있게 한 존재들이 누군데' 질타하는.

그럼에도, 그래서, 평단은 물론 파리의 상류인사들, 지식인들은 올랭피아를 불편해 했고 파리 살롱에 그림이 처음 걸린 그 순간부터 즉각적이고도 폭발적으로 올랭피아에 대한 혐오를 쏟아냈다.

마네에 대한 혐오와 비난은 신화 속 여신이 아닌 현실 속 창녀를, 성경 속 이야기가 아닌 몽마르뜨 뒷골목 이야기를, 여성의 몸을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려 그린데 대한 혹독한 대가였다.

 

티치아노 <우리비노의 비너스>-1538년, 캔버스에 유채, 119*165,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

하지만 모든 프랑스 지식인들이 마네와 올랭피아를 비난한건 아니었다. 마네를 옹호한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 있었다. 바로 당대의 모순과 부조리에 '나는 고발한다'며 온몸으로 저항한 에밀 졸라다

에밀 졸라는 '올랭피아는 걸작'이라며 마네를 이렇게 옹호했다. "지금 다른 화가들은 '비너스의 거짓' 만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마네는 스스로 물었다.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왜 진실을 얘기하지 않는지."

'천상의 비너스' 라는 거짓 환상과 창녀 올랭피아' 라는 실제 현실. 마네는 그것을 그렸고, 졸라는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간담상조(肝膽相照). 간과 쓸개를 서로 비춘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아도 뜻이 통하는 진정한 사귐을 뜻하는 말이다.

 

'올랭피아'와 '더러운 잠'. 원작의 비천한 흑인 하녀 자리엔 국정농단의 주역 최순실씨가 가있고, 음부 근처엔 강아지들이 허벅지를 긁어대며 '개판'을 치고 있고, '선글라스의 박정희'가 이를 보고 있다.

올랭피아의 목을 옥죄고 있던 검은 목줄은 느슨한 진주 목걸이로 치환됐고, 배꼽과 젖가슴 사이엔 사드 미사일이 놓였고, 태극기가 걸린 배경엔 세월호가 가라앉고 있다.

작가의 의도는 명백해 보인다. 최순실 국정농단, 세월호 7시간, 사드 배치 논란, '선글라스의 박정희'로 상징되는 음습한 공작정치, 블랙리스트 등 박 대통령에 대한 총체적 '풍자'로 읽힌다.

그럼에도 이를 표현의 자유로 봐야할지 박 대통령에 대한 모독과 모욕, 나아가 여성 자체에 대한 비하나 혐오는 아닌지 논란이 분분하다.

박 대통령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었다면 어땠을까. 우선 당연히 여성 비하, 혐오 등의 문제는 불거지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2004년 미국의 한 여성 화가가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을 풍자한 누드화를 워싱턴 시립박물관에 전시했을 때 미국사회나 언론에서 '남성혐오' 논란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남성 대통령을 누드 패러디 했다면 인권침해나 '대통령' 비하 논란이 벌어졌을 지언정 남성비하나 남성혐오 논란이 불거졌을 거 같지는 않다. 남성과 비하, 남성비하 라는 단어의 조합 자체가 낯설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 풍자 누드화에 대한 질타와 비난은 온전히 박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이유에서 기인하는가. 박 대통령 누드 풍자는 대통령에 대한 예의나 인권보호라는 보편적 권리 침해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라는 성(gender)의 문제인가 라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다시 미국의 경우를 보자. 지난 미국 대선에서도 이번 박 대통령 풍자 누드화와 비슷한 일이 여럿 있었다. 월가와 결탁한 클린턴을 풍자하는 등 클린턴 후보의 행동이나 말, 가치관을 풍자한 누드 그림이나 조형물이 심심치 않게 나타났다.

 

반응도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쾌해하는 시민들이나 관계당국의 요구로 곧 철거되거나 지워졌다. 클린턴에만 국한된게 아니라 트럼프도 비슷한 풍자물이 곳곳에 등장하곤 했다.

대선후보들에 대한 이런 누드 풍자와 관련해 워싱턴포스트가 남녀 후보 차이에 따른 흥미로운 기사를 내놨다. 트럼프의 누드는 풍자로 받이들이는 경향이 많지만 클린턴의 누드는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로 해석될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물론, 트럼프의 나체를 보면서 웃던 여성이 힐러리의 나체를 보면서 화를 내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라는 의견도 있다는 견해도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도 정치인에 대한 누드 패러디는 방점이 보편적인 인격침해 차원이 아닌 성(gender) 문제, 즉 여성비하나 차별 차원에서 다뤄지고 있는 듯하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확고한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는 미국에서조차 나이든 여성 정치인에 대한 누드 풍자에 대해 여성 비하나 차별 문제가 불거지고 있을 정도니 한국에서 박 대통령 누드화를 두고 엄청난 갑론을박이 일고 있는 것도 일견 이해할만하다.

표현의 방식이, 풍자의 방식이 꼭 '누드 패러디' 여야 했는지는 물론 아쉬움과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 사안을 성 이슈 프레임으로만 보는 것이 타당한지는 회의적이다.

더구나 이른바 진보적 여성단체들이 한사코 이번 사안을 여성비하 프레임으로 보는 견해엔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긴 어렵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끝을 보고 떠들게 만드는 것.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에서 부정적 이슈를 대체할 다른 이슈를 만들어내거나 해당 부정적 이슈를 희석시키거나 전도시키는데 흔히 쓰는 방법이다.

새누리당이나 보수 인사들은 그렇다 해도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 전체,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여러 여성단체들까지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으로 이런 프레이밍 형성과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듯하다.

풍자 꺼리를 듬뿍 만들어준 사람이 잘못인가, 있는 풍자 꺼리로 풍자를 한 사람이 잘못인가. 풍자의 내용이 본질인가, 풍자의 형식이 본질인가.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을 초래한 대통령의 실정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표창원 이라는 가해자와 여성성을 모욕당한 박근혜라는 '여성' 피해자만 남았다. 이런 프레임은 갈수록 강화되고 견고해지는 듯하다.

전시회를 기획한 '죄'로 표 의원은 당 윤리위에 회부됐고 새누리당 의원들은 표 의원의 의원직 사퇴는 물론 아무 상관없는 문재인 전 대표의 입장표명과 사과까지 요구하고 있다. 일부 네티즌들은 표 의원  부인의 패러디 누드를 합성해 유포하는 '보복 누드 패러디' 까지 벌이며 관련 이슈를 계속 특정 방향으로 생산하고 있다.

미국에서 클린턴의 풍자 누드를 그렸거나 만들었다는 이유로, 공개 장소에 갖다놨다는 이유로 처벌이나 불이익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고 한다.

작가를 잡아먹을 것처럼 공격하는 것도 없고 불쾌함의 표시도 그저 길거리 등 아이들도 다 볼 수 있는 공개된 장소에 외설적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을 그리거나 가져다 놓은데 대한 비난 성격이 강해 보인다.

외설과 표현의 자유를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동네 스트립바로 시작해 성인잡지 허슬러 등을 통해 포르노 왕국을 건설한 래리 플린트 라는 언론 재벌이다.

숱한 기행과 돌출행동으로 많은 논란을 낳았던 래리 플린트는 당대 가장 존경받던 성직자였던 제리 파웰 이라는 목사를 자신의 포르노 잡지 허슬러를 통해, 그것도 술광고와 엮어 심하게 모욕하고 조롱한다.

사건은 법정으로 간다. '명예훼손'과 '표현의 자유' 라는 가치 사이에서 1988년 연방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래리 플랜트의 손을 들어준다.

"수정헌법 제1조의 핵심은 사상의 자유이다. 개인의 언론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의 한 요소로 진리 탐구와 건강한 사회 유지에 필수 불가결하다. 하찮고 통속적인 논쟁이라도 수정 헌법 제 1조에 의해 보호 받는다."

'래리 플린트vs제리 파웰' 사건 연방 대법원 판결문 내용이다. 이 판결은 '공인은 대중의 비판에 따른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판결에 또하나의 금자탑을 쌓은 판결로 평가받고 있다.

나중에 이 스토리는 'The People VS Larry Flynt' 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 진다.

영화에서 플린트는 여성을 상품화해 착취하는 포르노 업자가 표현의 자유를 빙자해 포르노 사업을 정당화하고 그것도 모자라 경건한 삶을 살고있는 성직자를 모욕하고 조롱하고 상업적으로 이용까지 하고 있다는 숱한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에 대해 이렇게 외친다.

"나같은 쓰레기를 수정헌법 제1조가 보호해 준다면, 수정헌법 제1조는 여러분 모두를 더더욱 보호해 줄 것입니다."

박근혜 누드 풍자 그림은 여성을 대상화, 관음화, 비하, 혐오한 '쓰레기' 인가, 현 정권의 실정과 국정 난맥, 농단을 박근혜를 빌어 풍자한 '표현의 자유'인가.

박근혜 풍자 누드 그림은 미국 수정헌법 1조와 연방 대법원 기준에 따라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이 농후한 규제해야할 대상인가, 그저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창작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인가.

박근혜 풍자 누드 그림은 '대중의 비판에 대한 정신적 고통을 감내' 해야 하는 공인에 해당하는  박 대통령 본인과 그 추종자들의 '정신적 고통'을 제외하고, 국가나 사회, 시민 누구에게 그 어떤 실질적이고 현존하는 위해나 위험을 초래했는가,  아니면 장래에라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가.

'누드'에 집착하면 여성의 벌거벗은 몸만 보인다. 누드 위에 올려져 있는, 그 주변에 포개져 있는 이미지들을 바라보면 그림은 다른 의미가 된다.

무엇을 바라볼지는 바라보는 사람 각자의 선택이자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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