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에서 '건정'은 ‘대강’ ‘정결하다’ ‘말린 생선’ 등의 의미
형사소송법에 쓰일 때 의미는 달라... '건정을 열고'는 무슨 뜻?
법제처 2014년 “잠금장치로 바꿔야” 권고했지만 여전히 그대로

[법률방송뉴스]

‘건정’ 이라는 단어를 혹시 들어보셨나요. 저는 처음 들어봤는데요.

우리 법전에 이 ‘건정’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하는데,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그 뜻이 나오질 않습니다.

도대체 사전에도 없는 뜻의 말을 어디서 찾아내 어떤 경위로 법전에서 쓰고 있는 걸까요.

법률방송 ‘법률용어, 이제는 바꾸자’ 장한지 기자입니다.

[리포트]

[CNTV 드라마 ‘임꺽정‘]

“네가 백두산에서 온 임꺽정의 처남이냐.”
“그렇소.”

‘우리말의 보고’로 일컬어지는 벽초 홍명희의 대하 역사소설 ‘임꺽정’. 이 ‘임꺽정’에 보면 ‘건정’이란 순 우리말이 나옵니다.

“꺽정이의 내려가야만 할 사정을 황천왕동이가 중언부언 말할 때 꺽정이는 듣는지 마는지 건정으로 들으면서...” 라는 표현입니다.

‘건정’, 보통 “건성건성 하다” 할 때 ‘건성’과 같은 의미로, ‘대강대강’ 정도의 뜻으로 쓰이는 순 우리말입니다.

우리 형사소송법 제120조에도 이 ‘건정’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압수·수색영장의 집행에 있어서는 건정을 열거나 개봉, 기타 필요한 처분을 할 수 있다” 라고 돼 있습니다.

일단 ‘대강’이라는 뜻의 건정은 아닙니다. 건정을 열거나, 대강 열거나, 이렇게 쓰일 리는 없습니다. ‘건정’ 뒤에 목적어 조사 ‘을’이 붙는 점으로 미뤄 ‘명사’입니다.
 
건정을 열다, 무엇을 연다는 말일까요. 시민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이영우(72) / 경기도 광주]
“건정이 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모르겠는데.”

[구종민(32) / 서울 서초구]
“전혀 모르겠는데. 뭔 뜻인지 아예 모르겠어요.”

건정, 국어사전을 봐도, ‘대강’이라는 뜻의 부사나 ‘정결하다’는 뜻 정도의 어근으로서 건정, 오픈사전으로 확장해도 ‘말린 생선’이라는 뜻 정도만 나올 뿐입니다.

형소법에 ‘건정을 열고’, ‘말린 생선을 열고’라는 구절이 나올 리 만무합니다. 

형소법의 건정은 열쇠나 자물쇠의 ‘건(鍵)’과 덩이 ‘정(錠)’자를 씁니다. 열쇠 덩이 또는 자물쇠 덩이 정도의 뜻으로 의역하면 ‘잠금장치’ 정도의 의미입니다.

일본어로는 열쇠를 ‘카기(かぎ)’, 자물쇠는 ‘죠(じょう)’라고 하는데 열쇠와 자물쇠가 한 단어로 결합한 ‘카기죠’라는 말은 일본어에도 없는 정체불명의 한자 조합입니다. 

[일본인 관광객]
“카기 죠? 건죠? 모르겠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다나카 노리코 / 일본인 유학생]
“'카기'와 '죠'의 한자는 따로따로 사용되고 있는 말입니다. 하나로 합쳐져서 ‘카기죠’라는 말은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은 일본어입니다.”

법제처는 지난 2014년 9월 법령 전수조사를 하면서 총 37개의 일본식 용어를 정비 대상으로 확정하고, ‘건정’을 ‘잠금장치’로 바꿔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국어사전에도 해당 뜻이 안 나오고 어디서 유래됐는지도 모르는 정체 불명의 단어가 일반 시민들의 범죄를 규율하는 형소법에 버젓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박미정 교수 /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일과]
“아무리 찾아봐도 이건 나오지 않고요. 그냥 읽으면 ‘겐죠’라고 읽을 것 같은데, 열쇠·자물쇠를 같이 지금 쓰고 있거든요. 한국에 와서는 와전된 용어인 것 같습니다”

국어사전에도 없고, 일본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건정’, 도무지 어디서 왔는지 그 유래도 짐작할 수 없는 법률용어 ‘건정’.

‘잠금장치’라는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꿔야 합니다.

법률방송 ‘법률용어, 이제는 바꾸자’ 장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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