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하다’... 민법에서 3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
국립국어원 정비 권고 5년 지났지만 여전히 민법에

[법률방송뉴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일 인도 국빈 방문을 앞두고 인도 최대 영문 일간지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인용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인데요.

‘인용하다’하면 보통 ‘남의 말을 빌려 쓰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법에서는 이 '인용하다'가 좀 많이 다른 의미로 쓰인다고 합니다.

‘부부간에 서로 인용한다’ 무슨 뜻일까요. 법률방송 ‘법률용어, 이제는 바꾸자’ 장한지 기자입니다.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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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법은 ‘부부간의 의무’ 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부부는 동거하며 서로 부양하고 협조하여야 한다. 그러나 정당한 이유로 일시적으로 동거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서로 인용하여야 한다.”

‘동거하지 않을 때는 서로 인용해야 한다’, 참으로 희귀한 말입니다. 시민들은 어떻게 이해할까요.

[조영찬(60) / 경기도 용인시]
“무엇을 활용하는 거 아니야. 전에 있던 것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

[최영미(37) / 서울 노원구]
“인용하다... 뭔가 따라 사용하다라는 뜻 아닐까요.”

‘인용하다’, 한자로는 ‘끌 인(引)’, ‘쓸 용(用)’자를 사용합니다.

국어사전에서는 기본적으로 ‘남의 말이나 글을 자신의 말이나 글 속에 끌어 쓰다’는 뜻이 가장 먼저 등장합니다.

‘인정하다’의 ‘인(認)’, ‘용납하다’의 ‘용(容)’을 써서 ‘인정하고 용납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법에 나오는 ‘인용하다’는 사전에도 없는 ‘참을 인(忍)’ 에 ‘용납하다 용(容)’을 사용합니다. 

해당 민법 조항의 '인용(忍容)하다'는 그러니까, "부부가 동거하지 아니할 때에는 서로 참고 용납하라"는 뜻인 겁니다.

참을 인(忍)에 용납하다 용(容) ‘인용’, 지금은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15번이나 등장합니다.

봉건 왕조 시대에나 쓰였던 죽은 단어가 21세기 우리 민법 법전에여전히 살아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이태균(53) / 서울 강남구]
“사전에 없는 단어를 법률용어로 쓰면 그것은 안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차라리 그냥 ‘참고 받아들이다’라고 쓰던지...”

더 큰 문제는 같은 ‘인용’이라는 단어가 민법에서는 서로 다른 의미로 혼동돼 쓰인다는 점입니다. 

민법 제217조에서의 인용은 ‘인정하고 용납하다’의 뜻인 반면, 민법 부칙 제3조에서는 통상적으로 쓰이는 ‘남의 말이나 글을 자신의 말이나 글에 끌어 쓸 때’ 라는 뜻으로 쓰고 있는 겁니다.

[정완 교수 / 경희대 로스쿨]
“어떤 결과에 대해서 그것을 참고 받아들여야 된다는 뜻도 있고, ‘인정하고 용납해야 된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인용이라는 단어를 여러 가지 의미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립국어원은 2003년 국어 순화 자료집을 편찬하면서 ‘남의 말이나 글을 자신의 말이나 글에 끌어 쓸 때’ 쓰는 인용하다는 ‘끌어 쓰다’로, ‘인정하고 용납하다’의 ‘인용’은 ‘인정하고 받아들이다’로, 참을 인에 용납하다 용의 인용은 ‘참아 견딘다’로 쓸 것을 권고했습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권고’에만 그쳤을 뿐, 15년이 지나도록 바뀐 건 없습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
“그 부분을 서로 참고 견뎌야, 또는 참고 받아들여야로 다듬어서 제시한 적 있습니다. 사전에 없는 말들 꽤 쓰고 있죠, 법률용어 중에는...”

5년 전 법무부는 부부간의 조항에 등장하는 ‘인용’을 어려운 한자어로 선정했습니다. 그러나 민법에는 아직도 ‘동거하는 부부는 서로 인용한다’는 납득할 수 없는 말로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법률방송 ‘법률용어, 이제는 바꾸자’ 장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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