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자로서 단정적 표현 피하려는 직업적 습관"
"사법연수원 교육 과정서 수백, 수천번 배운 표현"

[법률방송뉴스] 법조 출입기자가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의 하나가 ‘상당(相當)'이라는 단어입니다. “상당한 이유가 있다”, “상당성이 인정된다” 이런 식의 표현인데요.

요즘 유행하는 법정 드라마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상당하다’는 표현. 어렴풋이 감은 오는데 정확히는 어떤 뜻일까요. 법률방송 ‘법률용어, 이제는 바꾸자’ 장한지 기자입니다.

[리포트]

헌정 사상 처음으로 파면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사유는 이렇습니다.

“주요 범죄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어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돼 있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한 영장 발부 사유도 비슷합니다.

“이 사건 수사과정에 나타난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으므로 피의자에 대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가 그것입니다.

구속의 상당성이 인정된다. 시민들은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까요.

[김봉주(56) / 서울 강남구]
“(‘상당성’이 어떤 말 같으세요?) 상당성이 인정된다? 이유가 있다, 그런 거 아닌가?”

[전형민(30) / 경기도 안양시]
“당연하다?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요? 구속이 어느 정도는 조금 보장이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일단 국어사전에서 ‘상당성’을 검색하면 ‘상당’이라는 단어는 여럿 나오지만 법원에서 쓰는 것 같은 ‘상당성’이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습니다. 사전에도 없는 단어인 셈입니다.

다시 국어사전에서 ‘상당(相當)하다’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형용사로는 크게 두 가지 뜻이 나옵니다. ‘어느 정도에 가깝거나 알맞다’나 ‘꽤 많거나 높다’ 정도의 뜻입니다.

전자는 ‘능력에 상당한 대우를 받다’, 후자는 ‘상당한 시간이 든다’ 정도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즉 ‘상당하다’는 ‘알맞다’와 ‘꽤 많다’라는 중의적인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여기에 ‘상당하다’는 동사로는 ‘~에 해당하다’, ‘해당하는’ 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얼추 잡아도 한 단어에 세 가지 서로 다른 뜻이 있는 겁니다.

실제 ‘구속의 상당성이 인정된다’ 할 때 ‘상당하다’는 ‘알맞다’, 즉 ‘적합하다’ 정도 뜻의 ‘상당하다’ 입니다. 

‘구속의 상당성이 인정된다’와 ‘구속하는 게 맞다’, ‘구속하는 게 적합하다’. 문법적으로나 뜻 전달 측면에서나 뒤의 표현이 훨씬 쉽고 명확합니다.

[국립국어원 공공언어과]
“‘상당하다’라는 말이 일상생활에서 ‘매우 많다’, ‘그는 상당한 재력가다’ 이런 식으로 ‘매우 많다’는 쪽으로 쓰잖아요. 법률적으로는 많다는 뜻이 아니라 ‘적합하다’, ‘합당하다’ 그런 쪽으로...”

문제는 이런 다양한 뜻을 가진 ‘상당’이라는 단어가 우리 법전 곳곳에서 말 그대로 ‘전가의 보도’처럼 남발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장 민법만 봐도 "피후견인의 재산 중에서 상당한 보수를 후견인에게 수여할 수 있다”, “보관에 상당한 주의를 해태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등 이곳저곳에 등장합니다.

전자의 ‘상당한’은 ‘적합한’으로 후자의 ‘상당한’은 ‘충분한’으로 바꾸면 훨씬 뜻이 분명해집니다.

그런데도 그냥 관행적으로 법전에서든 판결에서든 ‘상당한’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상당하는 표현이 이렇게 우리 법조계에서 두루 쓰이게 된 데에는 판사들의 ‘교육’을 포함한 직업적 환경이 작용한 영향이 큽니다. 

‘판단자’로서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할 수 없는 판사들의 직업적 성격 때문이라는 견해가 그것입니다.

‘어떤 것이 맞다’라는 단정적 표현 보다는 ‘어떤 것이 꼭 틀렸다고는 볼 수 없다’식의 표현이 필요한 겁니다.

‘~이 타당하다’라는 표현이 주는 단정적이고 선언적인 어감과는 달리, ‘~이 상당하다’는 포괄적이고 비선언적, 이른바 ‘톤 다운’된 어감이라 두루 사용하기에 편한 표현이라는 겁니다.

[권택수 변호사 /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
"‘상당하다’라는 말을 판결문에 많이 썼죠. 상당하다는 의미는 ‘그 나름대로 근거가 충분하다’ 이런 취지로 받아들였는데, 그 말도 사실 추상적이죠. 불확정 개념이고 가치판단적인 개념이어서 다만 더 친숙한 의미를 국민들에게 준다면 ‘타당하다’는 말이 더 가깝지 않나..."

실무적으론 사법연수원 민사재판실무 과목 ‘판결문의 주문을 쓰는 방법’에서 애초 ‘상당하다’ 라는 표현을 배우게 되는데 이 표현이 자연스럽게 관습화·습관화 된 이유도 있습니다.

[하상익 판사 / 대법원 사법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몇 십 년간 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에서) ‘항쟁함이 상당하다’라는 표현을 써 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희한테 그 표현이 저희한테는 너무나 익숙한 거죠. 2009년 11월에 보면 이게 바뀌었어요. 그 이후에는 법률에 맞춰서 쓰려면 ‘항쟁함이 타당하다’라고 써야 돼요."

우리 법전 여기저기서, 실제 재판과 판결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두루 쓰이지만 실제는 그 뜻이 불명확하고 모호한 법률용어 '상당하다'. 정확한 단어로 바꿔야 합니다. ‘법률방송, 법률용어 이제는 바꾸자’ 장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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